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2

저자
이우상 지음
출판사
다할미디어 | 2009-06-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왕릉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와 그 역사의 뒷이야기를 풀어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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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구성은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재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왕릉의 위치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닌다. 짤막한 역사의 내용과 함께 각 왕의 특징을 왕릉과 함께 엮어서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왕릉의 이름과 주인공, 그리고 간략한 특징들을 인용한 것이다. 독자로써 다음에 해당 왕릉을 찾을 때 한번 쯤 다시 보고 가면 좋을 듯한 특징을 나름 발췌해보았다.

 


광해군묘

그는 1641년, 귀양 생활 18년 만에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시의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했다. 조정은 유언에 따라 남양주에 있는 공빈 김씨 묘 아래쪽에 묻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 무덤을 돌보게 했다. 지금은 사적으로 등록은 되어 있으나, 돌보는 공익요원 한 명 없는 외로운 묘이다. (22쪽)

장릉 : 인조와 인열왕후

인조가 누워 있는 장릉은 비공개 능이다. 공개 못할 특별한 비밀이 있어서라기보다 워낙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역정을 대변하듯 외롭고 쓸쓸하다. 관리사무소에 말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동조 세력과 함께 혈기왕성하게 반정을 일으켰으나 재위 내내 불우했다. 정묘년, 병자년의 전란을 호란(오랑캐의 난)이라고 겨우 기록했지만, 참담한 굴욕의 역사다.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쌍릉이다. 제4대 세종의 영릉英陵과 7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 효종의 능은 1659년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 근처)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그 다음해에 인선왕후가 죽자 정혈에 묻는다는 풍수 이유로 왕릉 앞에 인선왕후의 능을 써서 앞뒤로 나란한 쌍릉을 이루었다. 동원상하봉이라는 특이한 모습이다. (52쪽)

숭릉 : 현종과 원비 명성왕후

숭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사대모화,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이니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이 아닌 중국 양식을 흉내 낸 것이다. 우리 고유의 정자각은 지붕 양쪽 옆면을 단정하게 정돈한 맞배지붕 형식이다. 검약, 검소, 단아함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숭릉의 정자각은 지붕이 불거져 나온 팔작지붕이다. 맞배지붕 양 옆으로 지붕을 덧달아 놓아 하늘 위에서 보면 한자의 < 八>자 모양이어서 팔작지붕, 팔각지붕이라고 부른다. 거기다가 정자각엔 익랑(문의 좌우에 잇대어 지은 행랑)에 기둥이 하나 더 붙어 있다. 능호인 '숭崇'자 역시 모화숭배자들이 작명한 것 같다. (66쪽)

명릉 :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명릉에 들어서면 능의 배치가 이상하다. 정자각에서 바라보면, 왼쪽 위 외따로 능이 하나 있고, 오른쪽 아래 정자각과 균형이 맞는 위치에 쌍릉이 있다. 왼쪽부터 제2계비 인원왕후, 숙종, 제1계비 인현왕후의 무덤이다. 이들을 통틀어 편의상 명릉이라 하는데, 법도에 맞지 않다. 동원이강 양식으로 본다면, 서열이 가장 낮은 제2계비가 상석이고 왕과 제1계비가 말석인 셈이다. 유교 풍수 국가인 조선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숙종 왕릉은 쌍릉에 해당되며 왼쪽에 있는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은 단릉 양식이다. 정자각도 없는 능이다. 사연은 이렇다.

...(중략)...
제2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 외따로 초라한 것은 그녀의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오래 살았다.
....(중략)...
숙종이 승하하자 청상과부 인원왕후는 33세에 왕대비(경종 재위시)에 올랐고, 37세 때(영조 재위시)는 자동적으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손자뻘인 영조와는 일곱살 연상이었다. 그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대왕대비 인원왕후는 1757년(영조33) 3월 26일 70세로 승하했다. 죽을자리, 죽을 시기를 잘 찾는 것도 복이다. 인원왕후는 그런 복이 없었다. 인원왕후보다 1달여 앞선 2월 15일,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65세로 승하했다. 정성왕후의 국장이 진행됐다.
...(중략)...
인원왕후는 영조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계모에 불과했다.


  영조는 대왕대비의 유택을 위해 경비와 인력을 들일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벌채 경비도 아끼고 정자각 건립 비용도 생략했다. 명릉 능역 하나 모퉁이를 살짝 오려내어 대왕대비를 안장했다. 가장 저렴한 왕릉 공사였다. 그래서 인원왕후의 능은 능호도 없고 정자각도 없다. (70~73쪽)


익릉 : 숙종 원비 인경왕후

능의 규모는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 익릉은 서오릉 중에서 가장 장엄(?)하다. 능호에 썩 잘 어울린다. 홍살문 밖에서 바라보면 막 이륙하는 점보기 같다. 홍살문에서 장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위쪽으로 경사지게 계단식으로 설치되어 있다 정자각 뒤로 능상이 우뚝 솟아 있다. 대단한 권력자의 무덤 같다. (90쪽)

의릉 :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그의 생애만큼이나 그의 무덤도 애달프다. 경종이 묻힌 의릉은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다. 재위시절 힘없는 왕이라 죽은 육신마저 남에게 의탁했다. 33년 동안 의릉 능역과 그 주변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관이 왕릉 일대를 접수해 무단 사용했다는 비난이 있다. (101쪽)

혜릉 : 경종 원비 단의왕후

조선 왕릉은 대부분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는데, 혜릉의 단의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발을 동쪽으로 향하게 누워 있다. 능의 침향, 즉 시신의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두는가는 민족, 종교, 지역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동쪽,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예가 많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5~6세기부터 중국의 영향으로 북침하기 시작했고, 신라는 통일 이후 동침에서 북침으로 바뀌어갔다.

홍릉 : 영조 원비 정성왕후

영조가 미리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마련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할아버지를 이곳에 묻지 않았다. 영조가 묻힌 자리는 103년 전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동구릉의 파묘 자리다. 조정의 논란 때문인가, 정조의 복수극인가? 풍수에서 파묘 자리는 혈이 파괴되어 흉지로 여긴다. 일반 백성들도 묘터를 잡을 때 기피하는 곳이다. (120쪽)

융릉 : 추존왕 장조와 경의왕후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었던 영우원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했다가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이라 했다. (141쪽)

건릉 :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은 현륭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159쪽)

왕자와 공주, 후궁의 공동묘지 그리고 태실 집장지

서삼릉 경역 내에는 왕자와 공주, 후궁 등의 묘 46기가 있다. 이 중 회묘(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묘)와 경선군묘(소현세자 장남 묘)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 공주 묘로 구분되어 집장되어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국립묘지 병사들의 묘역 같다. 왕릉 경역 내에는 왕자나 공주, 후궁의 묘를 쓸 수 없다. 그런데 서삼릉에는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사연은 이렇다.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왕직이 설치되었다. 이왕직에서는 서울•경기 일원에 산재한 왕자와 공주, 후궁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 한다는 명목 아래 서삼릉 경역 내 현 집장지를 선정했다. 일제강점기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유씨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15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하여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왕자묘로서는 고종의 제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그 많던 왕자와 공주, 후궁들은 어디로 갔나. 아직 서울•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여기 46기가 전부다. 역사에 이름이 올려진 이들은 번듯한 유택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갑남을녀처럼 사라졌다. (179쪽)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조선 제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1834년 순조가 왕위에 오른 지 34년 만에 승하하자 처음 파주 장릉(제16대 인조의 능) 곁에 능을 조성했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론이 대두되어 1856년(철종7) 헌릉(제3대 태종의 능) 오른쪽 언덕(우강 右岡)으로 이장했다. 다음해에 왕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순조와 합장했다. 헌릉과 함께 헌인릉으로 불린다. (189쪽)

경릉 :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

경릉은 3개의 봉분이 나란히 조성된 삼연릉이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고즈넉하다. 그러나 조성된 경위는 우울하다. 허약했던 청년 군주 헌종의 이력서다. 건원릉 서쪽 다섯 번째 줄기에 있는 경릉은, 원래 선조의 유택인 목릉이 있었다. 목릉을 건원릉 두 번째 줄기로 천장하고 비어 있던 자리였다. 헌종의 원비 효현왕후가 15세로 별세하자 이곳에 안장하고 능호를 경릉이라 붙였다. 6년 후인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곁에 묻었다. 왕이 살아 있을 때 왕비 곁으로 가고 싶다는 전교가 없으면 먼저 죽은 왕비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이 법도다. 안동김씨들은 길지를 물색한다고 열세 곳이나 다녔다고 둘러대며 추천한 능지가 여기다. 흉당으로 꼽히는 파묘 자리인데다, 헌종은 능호도 얻지 못했다. (203~204쪽)

홍릉 : 고종과 명성황후

42기의 조선 왕릉 중 홍릉(고종 능)과 유릉(순종 능)에만 없는 것은 뭘까? 답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표본인 태조의 건원릉부터 25대 철종의 예릉까지,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인 26대 고종과 27대 순종 능을 제외한 모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왕릉 입구인 홍살문과 봉분 사이에 자리한다.

  선대 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핵심 구조로 꼽힌다. 평면이 '丁'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홍릉과 유릉에는 정자각대신 ' 一'자 모양의 침전이 있다. 왜 그럴까? 비밀은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에 있다.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이후 왕릉 형식도 '一'자 모양 침전이 있는 중국 황제릉과 비슷해졌다. 
(215쪽)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1월 30일 남양주시 금곡에 능역을 잡고 산역을 시작했다. 같은 시각 청량리 홍릉에서도 능을 파기 시작했다. 2월 16일 명성황후가 먼저 금곡으로 이장되었다. 3월 3일 전날 발인한 고종은 명성황후와 합장되었다. 그들은 24년 만에 지하에 함께 잠들었다. 망국의 황제는 능호도 없다. 홍릉은 부인 명성황후의 능호이다. (227쪽)



유릉 : 순종과 원비 순명황후 및 계비 순정황후

유릉은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제27대 순종과 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의 3인 합장릉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유일한 동봉3실의 합장릉이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로 승하해, 같은 해 6월 11일 이곳에 초장봉릉되었다. (250쪽)



(오류)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사람이 이세완의 부인? (p58)

--> 이세완의 부인이 종친이라서 이세완이 염습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아무리 종친이라지만 여인이 세자의 염습에 참여할 수 있을까???

 

 

 

 

<목차>

우리 시대에 왕릉이란 무엇인가

제15대 광해군과 문성군 부인 광해군묘
역사는 준엄한가, 너그러운가, 애석한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
왕이란 이름은 물려주기도 하고, 올려 바치기도 하네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 장릉
반정은 짧고 굴욕은 길다

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 예송논쟁에 휘말려 살다 간 불우한 여인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영릉
북벌의 영웅인가, 순진한 몽상가인가

소현세자 소경원
명분보다 현실을 중히 여기다가 고혼이 된 선각자

제18대 현종과 원비 명성왕후
숭릉 치적 쌓을 틈도 없이 예송논쟁에 시달린 왕 노릇 15년

제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명릉
여인천하 경연장의 외로운 감독, 숙종

희빈 장씨 대빈묘
애욕은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제19대 숙종 후궁 숙빈 최씨 소령원
무수리에서 왕의 여자,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

제19대 숙종 원비 인경왕후 익릉
이승에서는 박복했으나 유택은 웅장하네

제20대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의릉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제20대 경조 원비 단의왕후 혜릉
이름도, 흔적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어요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원릉
조선의 장수왕, 영조

제21대 영조 원비 정성왕후 홍릉
천하 명당에 누웠건만 옆구리가 시리다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영릉
아홉 살 나이에 정조의 아버지가 되다니?

추존왕 장조와 경의왕후 융릉
야속한 아비의 아들, 장한 아들의 아버지 사도세자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꿈을 펼친 수원 화성과 행궁
정조와 효찰 대본산 용주사

내시 무덤
왕의 손발, 왕의 그림자, 내시 이야기

궁녀 무덤
이름 없는 여인들, 여기 잠들다

왕자와 공주, 후궁의 공동묘지 그리고 태실 집장지
어이! 왕자, 공주, 차려! 가로 세로 줄 맞춰! 거기, 후궁도 마찬가지!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인릉
해는 서산으로, 조선의 역사도 함지咸池를 향해 가네

추존왕 익종과 신정왕후 수릉
조선의 마지막 희망, 촛불춤으로 지다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 경릉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삼연릉의 비밀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예릉
허수아비 왕의 사랑과 비극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홍릉
대원군의 아들, 명성황후의 남편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오
천인공노天人共怒란 말이 부족하다, 명성황후 시해弑害

흥선대원군묘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 흥선대원군

고종의 후궁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 영휘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 숭인원
아관파천의 행동대장 엄귀비와 나란히 잠든 핏덩이 황손
핏덩이 이진의 죽음

제27대 순종과 원비 순명황후 및 계비 순정황후 유릉
마지막 황제의 선물, 6·10만세운동

영친왕 이은과 비 이방자 여사 영원
격랑의 한일근세사를 살아온 영친왕 전하!

의친왕 이강과 비 김수덕 여사 묘
조선 왕조의 마침표, 비석조차 없는 의친왕의 무덤

에필로그 최상의 죽음은 법문이다

[부록]
▷조선시대 능·원·묘 일람
▷조선 역대 왕 생존연대 및 재위기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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