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개정판)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출판사
청년사 | 2005-04-29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개정판 출간 의의[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의 ...
가격비교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작은 소제목별로 주제에 해당하는 내용을 발췌하여 적어 놓는다. 독자인 내가 생각하는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

 

 

조선 인구가 1천만명을 넘어선 시기는
"조선시대의 인구가 1천만 명을 돌파한 시기는 대체로 1500년 전후의 시기, 즉 16세기 전후임도 알 수 있다." (19쪽)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매일매일 이혼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혼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가 최대한 이혼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절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까지 정절을 지키자니 재혼이 금지될 수밖에 없었고, 재혼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혼녀가 양사나된다는 것은 곧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이ㅔ 처를 버리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금지되었고, 따라서 칠거 사안 중 음란과 시부모에 대한 불효 외에는 거의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다." (33쪽)


"그런데 이혼이 어렵다거나, 그래서 소박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거나 하는 것은 주로 양반층이었고, 서민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이혼이 쉬웠다. 사정파의 또는 할급휴서라는 방법이 있었다. 사정파의란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부부가 맞주 앉아 부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의 말을 하여 서로 응낙한 뒤에 이혼하는 것이다. 할급휴서는 이혼 문건 같은 것으로서 칼로 웃옷의 자락을 베어 그 조각을 상대방에게 주어 이혼의 표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민의 경우로 사대부가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35쪽)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족보를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 족보를 믿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족보상의 시조와 나는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39쪽)



향약은 지방자치의 원형이었을까


서당에서 향교, 서원까지
"양반 자제들읭 고급 관료로의 본격적인 진출은 초등교육 단계인 서당 공부를 거쳐 향교 서원 단계이 중등교육을 마치고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들어간 다음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61쪽)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두레는 생산 주체인 피지배 농민들이 구성한 노동조직이라는 점, 대상의 범위가 전통적인 생활문화 공간이었던 마을을 단위로 하고 잇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이에 따라 두레는 단순한 노동조직이라기보다 마을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과 관련되면서 기능하고 있었다. 이 점은 두레 조직이 그 자체의 성격상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문화 변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71쪽)



신분 사회의 피해자, 백정
"고려시대에는 16~60세의 저어남이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일반 요역 외에 군인,향리,역정 등처럼 특수한 신분 계층의 사라마들이 지는 세습적인 신역 내지는 직역이 별도로 존재했다. 신역,직역의 부담자를 정호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호를 제외한 일반 농미니은 백정이라고 불렀다. 정호에게는 원칙적으로 일바나 요역에서 면제해 주고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역으로 지는 대가로 지급해 주었으나, 백정에 대해서는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백성이라 촌민 등의 이름으로 불렀고, 그 대시니 백정이라는 이름은 주로 도축업,고리제조업에 종사하던 계층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87쪽)


"이처럼 양수척, 화척의 유래는 매우 오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가운데 일부는 고려시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대내외적 혼란기를 틈타 한반도에 들어온 북방 유목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정층 모두가 이들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는 거골장이라고 불리던 전래의 도축업자들이 전 지역에 걸쳐 상당히 많았다. 이들의 명칭은 16세기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보아 이들은 도축이라는 업종의 유사성으로 인해 백정층으로 자연히 흡수된 듯하다. 이 밖에도 토지로부터 이탈된 많은 유랑민들이 경제저거인 이유 등으로 백정층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89쪽) 



임꺽정의 분노와 좌절
"임꺽정은 관군과의 3년에 걸치는 전투 끝에 생포되어 1562년 초에 최후를 마쳤다. 임꺽정 부대의 활동은 봉건국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사 수령,부장 등을 서슴없이 처단하였으며, 재상, 관료, 양바나 등 봉건 지배층을 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봉건 정부는 이들을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도적의 무리인 군도가 아니라 국가 기틀을 뒤흔드는 반적으로 여겨, 많은 반대와 희생을 무릅쓰고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7쪽)


"임꺽정의 반란은 훈구와 사림 세력의 교체를 촉진하였다. 기존의 지배 세력을 역사의 무대에서 글어내리고, 새로운 사회 세력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임꺽정 자신의 문제인 천민층의 신분 해방은 해결하지 못했다. 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사실은 의문이다. 그는 원초적으로 봉건 지배층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항심을 지녔지만,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생산 대중의 힘을 결집하여 해결하려는 사회의식은 지니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저항은 생산 활동에서 유리된 채, 잉여물을 약탈하는 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108쪽)



조선시대 형벌 제도는 어떠하였나
"그런데 모든 관청에서 죄인을 자의로 처결한 것은 아니었다. 사형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오직 국왕만이 가지고 있었고, 관청별로 죄인을 처벌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방 군현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태형에 처할 만한 가벼운 범죄의 경우만 수령이 직접 처결할 수 있었으며, 장형 이상의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영에 있는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경우에는 관찰사가 국왕에 보고하였고, 국왕만이 최종 사형권을 행사하였다. 사형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세 차례릐 심리 과정을 거친 후 연말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백성들이 억울한 옥살이라를 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에서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11쪽)



돈 한 냥, 쌀 한 말, 베 한 필의 가치
"18세기 쌀 한 섬의 평균 시세를 닷 냥으로 본다면, 한 냥의 구매력은 오늘날의 화폐단위로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의 한 섬은 지금 한 섬의 60퍼센트 내외이고, 지금 현미 한 섬은 155킬로그램이다. 2004년 8월 현재 보통 품질의 쌀 20킬로그램의 소매가격은 55,000원 정도이다. 그렇다면 18세기 한 섬은 지금 시세로 25만원 남짓하고, 한 냥의 구매력은 지금 화폐로 5만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132쪽)



농사는 어떻게 지었나
"벼 재배 과정은 이른 봄철 논을 갈고 고르는 작업, 봄철의 씨앗 뿌리기와 씨앗 덮기, 여름철의 김매기와 비료 주기, 가을철의 벼 베기, 늦가을 초겨울의 논갈이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벼 재배 방법에는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 비료 성분을 묻힌 볍씨를 물이 없는 논에 파종하는 건경법, 못자리에서 모를 일정 정도 키운 다음 전체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 등이 있었다." (136쪽)



서울의 장사꾼들
"이 시전에 속한 상인들은 세칭 우대사람라고 불렀다. 이들은 직업을 대대로 물려받았으며, 각각 방이라고 하는 개별 전포에서 장사를 했다. 즉 입전에 속한 상인들은 입전 일방, 입전 이방 등으로 부르는 점포에서 각각 장사를 했다. 우리가 상점을 보통 전방이라고 하는데, 바로 시전의 전과 점포의 방을 합쳐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애초에 시전은 정식 건물을 지어 입주하였으나, 시전 상인의 수가 늘면서 정식 상가 옆에 임시 건물을 지어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임시 점포를 가게라고 한다. .오늘날 가게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146쪽)



장돌뱅이의 애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모시 산지로  유명하였던 충청도 홍산, 임천, 한산, 비인, 남포의 장사는 2,7일, 5,10일, 1,6일, 3,8일, 4,9일에 열리고 있었다. 각 고을만 보면 여전히 5일 간격의 정기시만 열렸지만 이들 지역 전체롤 보면 매일 장시가 열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은 바쁜 농사철에도 짧은 거리만 가면 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이익을 본 사람은 장시를 돌아다니던 행상이었다. 이들은 하루 왕복 거리를 두고 날짜를 달리하여 열리는 장시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인접 장시 사이에 열리는 날자가 조정됨으로써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146쪽)



역관들이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는데
"역관 선출은 역관의 과거인 역과를 통해 이루어졌다.
......
조선 후기에는 정기 시험 외의 과거가 자주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역관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숙종 대에는 총 600여 명의 역관이 사역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역관들 중 실제로 필요한 인원은 50~60명에 불과하였다.


정보는 일일이 이들에게 직책을 마련해 줄 수 없었으며 이들 모드에게 보수를 지급할 만한 재정적인 능력도 없었다.
......
이에 따라 정부는 임시 방편책으로 역관에게 체아직을 제수하게 되었다. 즉 관원 몇 명이 한 명 몫의 녹봉을 나누어 받고 돌아가며 근무하는 체아직 제도를 역관에게 적용함으로써 실수요 인원보다 10여배에 달하는 역과 합격자를 수용하여 역관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아직은 보수가 충분치 않아 역관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하였다.
......
이는 역관들로 하여금 사신을 수행하여 외국에 가는 것을 무역의 기회로 포착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
역관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체아직 제도를  실시한 조선 정부는 이제 역관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무역 자금을 가지고 갈 수 있게하여, 공식적으로 이 범위 내에서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이것은 체아직에 대한 일종의 보수였던 셈이다." (174쪽) 



광산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조선 초기에는 금,은 광산에 대해 정부에서 억제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농민들도 힘든 작업에 대한 동원만 되고 자기 이익을 취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광산 개바라을 반대하였다.
......
결국 성종 대 <경국대전>에서는 금의 채굴을 금지하고 다만 그 광산을 잘 보호하도록 법제화하였다.
......
16세기에는 중국과 무역이 확대되어 비단 수입이 늘어나고 그 값으로 지불하기 위한 은이 많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은광을 채굴하는 것 외에 민간인의 불법적이니 채굴도 이루어졌다.
......
17세기에는 정부에서ㅓ 경영하는 수공업이 해체되었으며 그것은 광산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17세기 중반에는 정부는 파주, 교하, 곡삿ㄴ, 춘천, 공주 등지에 은광을 열과 세금을 징수하였다.
......
이 시기 중앙의 군영이 제각기 광산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은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호조에서 광산을 일원적으로 관리하면서 변화해 갔다.
......
이 때의 노동자들은 토지에서 밀려나고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려 호적에도 들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앞 시기에 비해 임금노동자로서의 성격이 짙어져 매월 또는 매년 일정액의 임금을 받고 일하였다.
......
18세기 말, 19세기 전반기에 와서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 민영 광업이 발전하였다. 이때는 국가의 비효율적인 통제 속에서 은광은 오히려 쇠퇴하였지만, 큰 이익이 남은 금광의 개발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제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광산 노동자, 가족노동력을 이끌고 금광 채굴에 나서는 사람들이 더욱 일반화하였다."
(184쪽~187쪽)



하얀 작은 황금, 소금 - 생산에서 세금까지
"소금 생산은 한달에 상,하현 기간인 12일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하였고, 그것도 비가 오지 않는 봄,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소금의 생산량은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그 가격은 매우 높아 당시 쌀값의 절반 이상 되었다. 이러한 소금 생산은 날씨에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짓는 농사'라고 하였고, 하루 종일 땡볕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땀을 식히고 피로를 풀기 위한 노동요와 민속놀이인 소금놀이마당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소금 생산 과정은 힘들어 무거운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는 소금을 굽게 하는 도형(징역)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197쪽)  



농민의 조세 부담


궁궐의 뒷간
"그럼 궁궐에 뒷간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자료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 <궁궐지>와 함께 작성된, 크고 상세한 도면인 <북궐도형>과 <동궐도형>은 당시 궁궐의 모습을 좀 더 정확하게 보여 준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뒷간이 28군데나 있었으며, 그 규모를 모두 합하면 51.5간이었다. 동궐에는 21군데, 36간 정도의 뒷간이  있었다. 뒷간은 대개 한 간이었으나, 큰 것은 일곱 간에 달했다. 한 간짜리 집이란 네 개의 기둥으로 된 가장 자은 건물이다. 주택으로서 가장 작은 것을 흔히 '초가 삼가나'이라 하는 데 비해 뒷간이 일곱 간이라면 화장실치고는 제법 큰 건물이다." (229쪽)



농민의 하루살이와 한해살이
"국가에서 또는 지방 수령이 농사일에 자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사람이 바로 늙은 농부였다. 세종대왕이 <농사직설>(1429)을 편찬하기 위하여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농업기술을 수집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강조한 것도 당시 각 지역의 가장 선진적인 농사 기술을 알고 있는 노련한 농부의 경험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효종 대에 신속이 <농가집성>을 편찬할 때 참고한 것도 당시의 속방 즉 어느 지역, 어떤 농부들이 사용하고 있던 선진적인 농업기술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노농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241쪽)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 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254쪽)



조선시대의 술과 주막
"금주령을 어기면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양에 따라, 용도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서, 훈방에 그치는 경우부터 장 일백 대를 친 후 변방 산골짜기나 바닷가에 유배 보내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형량이 무거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왕명의 권위에 민감했던 영조는 처벌에도 단호했다." (262쪽)


"그런데 금주령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술을 먹어되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통틀어 다섯 명밖에 안되는 사간원 언관들이었다.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들은 공무 중은 물론 금주령하에서도 음주를 허용받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왕의 잘못을 들춰내어 바로잡는 어려운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평소에도 이렇게 기개를 꺾지 말고 키워 두어야 자신의 직위와 생명을걸고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63쪽)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한다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경우 혼자서 담배통에 불을 붙이면서 물부리를 빠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불을 붙이는 하인이 딸리기 마련이었다. 즉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양반층을 비롯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계층에 국한되고 일반 상민은 곰방대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층 가운데서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은 백통이나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이나 은으로 무늬를 넣어 치장한 장죽을 사용하기도 했다." (275쪽)



조선시대의 군대생활
"이처럼 조선의 군대는 현재의 군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양반의 군대 생활은 관료롤 진출하는 특전을 얻는 것이었지만, 군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반 양인들에게 군대 복무는 감당하기 힘든 고된 생활이었다. 복무 기간이 긴 점, 하급 군사에게 월급이 제공되지 않은 점, 종종 군인 스스로 무기나 복장을 마련함으로써 군인의 경제적 부담이 심했던 점, 신분에 따라 군대 편성이나 처우가 달랐던 점, 군역세를 내는 군역 담당자가 존재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의 군인들은 공식적으로 군역에 면제되는 것과는 별도로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병역을 기피하려 하였다." (282~283쪽) 

<목차>

조선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선 시기는 /고동환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 /권순형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정진영
향약은 지방자치의 원형이었을까 /권내현
서당에서 향교, 서원까지 /장동표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이해준
신분 사회의 피해자, 백정 /권기중
임꺽정의 분노와 좌절/한상권
조선시대 형벌 제도는 어떠하였나 /심재우
돈 한 냥, 쌀 한 말, 베 한 필의 가치 /이헌창
농사는 어떻게 지었나 /김건태
서울의 장사꾼들 /이욱
장돌뱅이의 애환 /유필조
역관들이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는데 /김경란
광산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오수창
하얀 작은 황금, 소금 - 생산에서 세금까지 /김의환
농민의 조세 부담 /김성우
궁궐의 뒷간 /홍순민
농민의 하루살이와 한해살이 /염정섭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 /정연식
조선시대의 술과 주막 /정연식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한다 /오종록
조선시대의 군대 생활 /서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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