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개정판)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출판사
청년사 | 2005-05-1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개정판 출간 의의[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의 ...
가격비교

 

 

조선시대 삶을 보여주는 시리즈의 두번째 책.

 

 

어린 왕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나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기보다는, 김상헌의 후예로서 17세기 중반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정치의 핵심을 이루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외척이 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
역사를 국왕의 나이와 같은 우연한 요소, 개별적인 사실에 매달려 설명하는 것은 그 시기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왕권의 약화와 외척의 권력 집중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세도정치는 결코 국왕의 나이가 어렸던 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사회 변화를 근저에 두고 변모되어 온 조선의 지배 체제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상태였다." (25쪽)



황실 호칭의 이모저모


사도 세자는 왜 뒤주에 갖혀 죽었을까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에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그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 준 것이었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그토록 살려 달라고 애원했음에도 물도 주지 못하게 했고, 자신이 사랑하고 보호했던 세손(정조)이 울면서 애원하는 것도 외면했던 행동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조처였다.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앞뒤가 다른 이러한 행동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영조의 의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그 아들 정조와 부인 혜빈 홍씨를 각별하게 보호하였다 이 또한 영조의 변덕스러운 심리의 발로라기보다는 다음 왕위를 이을 세손을 보호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지키려는 의도였다. 그러한 보호 덕분에 정조는 순탄하게 즉위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탕평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47쪽)



흥선대원군은 왕처럼 행세하였는가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외척 가문의 권위를 대체할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과감한 '개혁' 때문이었다.
......
그는 우선 세도정치 아래에서 각종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과감히 숙청하고 이들이 부정으로 축적한 재산을 철저히 조사해서 국고에 환속시켰다. 한편 세금을 되도록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부과하려 했다. 지난 수십 년간 머뭇거리기만 하고 시행하지 못했던 정책들을 흥선대원군은 과감하게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세도정치기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 밖의 문제점들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58~59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닭
"이처럼 4월 18일 평양을 떠났던 정벌군은 5월 22일 아침에 위화도에서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어째서 정벌군이 평양을 떠나 위화도에 주둔하기까지 20일 가까이 걸렸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음력 4월부터 비가 많이 왔었는지, 실제로 건너기 어려울 정도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났었는지 등등 의심한다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이 위화도에서 회군할 무렵 "큰 비가 며칠 내렸지만 물은 불지 않았다. 회군하여 겨우 물가에 닿았을 때 큰 물이 몰려와 온 섬이 물에 잠겼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라는 기록이다. 즉 큰 비는 회군하기 직전 며칠 동안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추고 또 장기간 위화도에 머무르며 큰 비를 기다렸다고 짐작된다. "이 때 민간에서 목자(곧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번에 군 중에서도 모두 불렀다."라는 기록도 있어서, 군사들이 이성계가 왕이 되려 한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63~65쪽)



임진왜란은 과연 이긴 전쟁인가
"전쟁은 결코 승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전쟁의 성격과 규모도 정확히 예견하지 못했고, 또 늦게나마 위기를 인식한 뒤에도 충분한 군사적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전 국토가 유린되고 온 백성이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죽고 갈라진 그 형상을 보고서 차마 전쟁을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일본만이 아니라, 전쟁을 사전에 막지 못한 조선왕조의 국왕을 비롯한 집권층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82쪽)



사간원 헌납 김조선의 하루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일생
"이항복처럼 영의정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전체 문과 급제자 중 1퍼센트도 안되었다. 청요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도 문과 급제자 중 25퍼센트에 불과했다. 사실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수재들과의 경쟁을 뚫고, 문과에 급제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은 끝내 문과에 합격하지 못하고 평생 '길 떠나는 나그네'로서 과거에 응시하기만 하다 삶을 마감하였다." (107쪽)



백성들이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는가
"그러나 아무 때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먼저 담당 관원에게 호소하여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게 했다. 지방에서는 먼저 자기 고을의 수령에게, 그 다음 관찰사에게,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도록 했다. 사헌부의 처리에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신문고를 치도록 하였다. 이때 각 단계별로 전 단계의 관원에게서 그 사안을 처리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제출해야만 다음 단계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정당한 사유가 있더라도 신문고를 칠 수 없게 했고 오히려 엄한 벌을 내렸다. 정치의 득실이나 민생의 안정과 관련되어 건의할 것이 있는 사람도 먼저 의정부에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문고를 칠 수 있게 했다. 다만 역모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에는 바로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115~116쪽)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지자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상언과 격쟁만이 남게 되었다. 상언은 대부분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 앞에 나아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왕이 있는 곳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왕의 이목을 끈 다음 구두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독특한 제도였다. 상언은 신문고에 비해 절차가 간편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기 쉬운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알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격쟁도 별다른 제약은 없었지만 격쟁을 한 사람은 먼저 형조의 취조부터 감수하여야 했다. 상언이나 격쟁도 처음에는 신문고와 마찬가지로 호소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제한되었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것돋 금지되어 있었다." (118쪽)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었을까
"이렇게 <경국대전>의 규정은 관제와 같은 통치 체제의 골격에서부터 교육,과거 제도의 세부 규정, 토지,가옥,노비 등 재산권의 보호 및 분쟁 해결 절차, 그리고 관리의 예절은 물론 서민을 대상으로 한 풍속상의 권장 사항까지 그 내용이 아주 다양하였다."


"요컨데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 체제와 국정의 기틀을 세우는 헌법의 성격은 물론, 행정 절차를 규정한 행정법이며, 형사와 민사에 관한 기본 법전인 동시에 관혼상제 등 풍속에 관한 사회규범까지를 담고 있는 매우 포괄적인 법전이었다." (130쪽)



17세기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들
"그러나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 양국 과나계가 문자 그대로 자존심을 내팽개친 무조건저인 사대 관계는 아니었다. '사대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과 국제적인 역관계를 조선 나름대로 고려하여 탄력적으로 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조선 초기에 특히 그러하다.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들어 그를 사대주의자로, 조선 건국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을 대국으로 인정하면서 그들의 책봉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형식일 뿐 자존심까지 내팽개치고 섬긴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 관계는 국가 안보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려는 현실적인 생존의 방도였다." (131~132쪽)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는 <대동여지도> 속에 써넣은 설명문에서 이 지도가 뒷날 국방상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전통 사회에서도 지도가 가장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는 곳은 국방 분야였으므로 이 점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데에 있다. 중인들은 오래 전부터 지도 제작 실무를 맡아 오고 있었지만, 이처럼 독자적으로 지도를 기획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언급하는 것은 김정도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양상이었다. 이는 중인들의 의식이 전보다 성장해 나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46~147쪽) 


"이미 조선 후기 관찬 지도 제작의 역사 속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들 만한 기술적 여건은 대부분 충족되어 있었다. 따라서 김정호는 축적되어 온 지도 제작 기술과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50쪽)


오랑캐, 왜구보다 더 무서웠던 역병
"조선 후기 사회에서 역병이 크게 돌게 된 까닭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국제적 측면에서 이 시기 국제 교역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질병사 연구에 다르면, 18, 19세기 전염병은 거의 전 세계에서 발생했다고 하는데, 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인 조선 역시 이 세계 역병 유행 지도의 한 부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두창이나 콜레라 등은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다. 둘째로 사회변동도 역병이 크게 도는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농촌 사회의 분해와 도시의 성장에 따른 인구의 밀집은 전염병이 유행하기에 좋은 조건을 조성하였다. 지역 사이의 교류와 인구의 밀집으로 인해 악화된 환경은 전염병 병균의 훌륭한 서식지 노릇을 했다. 셋째로 문화,관습적 측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으며, 채소를 잘 씻지 않고 그냥 먹기를 즐겼고, 우물 가까운 곳에 뒷간이 위치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장례식 때에는 일가가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 같은 장례 풍습은 매우 강고해서, 지역 단위로 역병이 유행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 놀이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말에 원나라로부터 도입된 타구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방희 또는 격방으로 불리면서 15세기에 크게 성행하였다. 타구는 놀이 기구도 간단하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또 생활 주변의 빈 공간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놀 수 있기 때문에 왕실이나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이 즐길 수 있는 놀이였다." (175쪽)



조선시대 화원들의 이력서
"화원들은 개별 작품도 그렸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국가의 공식 행사에 동원되어 그림을 그리는 일에 보냈다. 화원들은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도감이라는 기구에 소속되었다. 화원들은 작업이 시작된 날부터 각 숙소에 배속되어 작업을 했다. 이들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도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처벌을 받았다. 이들은 작업의 대가로 월급에 해당하는 쌀과 포목을 매달 그믐에 지급받았다. 조선 후기에 이들의 급료는 대개 쌀 6~9두, 포목 한 필 정도였다. 또한 작업 성적에 따라 일부 화원에게는 포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185쪽)



판소리는 과연 민중 예술이었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패션 감각
"조선시대 사람들은 염색법을 몰랐던 것도 흰옷만 입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사용되던 염료는 주로 식물성이었고, 대표적인 것으로는 쪽이 있다. 쪽을 이용해서 옷감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는데 물들이는 횟수와 농도를 조정하여 연푸른색부터 짙푸른 색까지 다양한 색깔의 옷감을 만들어 냈다. 이 밖에도 치자나 유색 식물들을 이용하여 옷감을 염색했다." (211쪽)



보우는 요승인가, 성인인가
"명종 때의 불교 부흥은 불교계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 문정왕후가 발의해서 시작하였고,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중단되었다. 불교 부흥을 둘러싼 공방은 문정왕후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반면 불교계가 유학자들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부흥의 정당성을 역설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26쪽)


"한편 보우가 조선 불교를 기사회생시킨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불교도들이 이미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과연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불교를 재건한 인물인가? 불교의 진정하나 재건이 되려면, 고려 말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엄격한 반성과 더불어 조선시대 불교로서의 개혁저인 전망이 있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보우의ㅣ저술에서 그러한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보우가 선교 조화와 유불 일치의 입장에 서기는 하였으나, 이를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227~228쪽)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주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조선 지식인들 역시 17세기경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접촉하면서 우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서양의 우주론을 처음 접한 조선 지식인들의 충격은 상당하였다. 특히 지구가 원형으로 생겼다는 지구설은 커다른 파장을 던졌다. 지구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면 지구상에 중심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교한 서양의 세계지도에도 중국은 좀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도저히 중심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 중화주의에 침잠해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중화라는 실체의 상당 부분은 허구였음을 뜻하며, 그렇다면 조선 중화 역시 허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38~239쪽)



조선 군대는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웠을까


격조 있는 읽기, 쓰기, 보기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한동안 사찰은 여전히 유력한 출판 기관이었고, 그 출판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가장 역량 있는 인재들을 확보한 보고였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출판 기술도 조선시대의 출판 사업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255쪽)


"건국 초기의 지방 출판이 사찰의 축적된 출판 능력을 기초로 이루어진 데 반해, 이 시기에 이르면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새롭게 조선 사회의 지도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사림들에 의해 출판 사업이 주도되었으며, 그 무대가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의 확산은 항시적인 사림의 출판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요즘 말로하면 각 학교마다 출판부가 있어 책을 출판하는 형세와 같은 셈이었다." (257~258쪽)



조선은 주자학 때문에 망했을까
"주자학과 성리학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우리가 흔히 주자학이라 부르는 것은 엄격히 말하여 성리학의 일부에 불과하다. 성리학은 원래 '성명의리의 학'이 준말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 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새로운 유학 사상 체계로 성립되었다. 당말 송초를 거치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주론, 존재론, 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267쪽)


"주자학 자체는 중세적 사상이었다. 중세 사회가 마감되고 근대사회로 옮겨 가던 시점에서 주자학은 이미 그 임무를 마침과 함께 생명력도 다하였던 것이다 주자학이 역사 발전에 장애로 작용하였다고 해도 그 책임을 주자학 자체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책임의 대부분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여 새로운 단계에 맞는 사상을 개발하고 수용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주자학을 고수하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사람들에게 지워져야 할 것이다." (277쪽)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런데 아직도 첫머리에서 제시한 아리랑은 소개하지 않았다. 이 노래는 실은 1920년대에나 나오게 된다. 곡조에서나 가사에서 기존의 아리랑들과 다른 '신아리랑'인 것이다. 1926년 나운규가 연출, 주연을 한 영화 <아리랑>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단성사로 몰려갔으며 이후 2년 6개월간이나 전국을 순회 상영하면서 일제하 조선인의 심금을 울렸다. 사람들은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모두 눈물을 흘리며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같이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장 흔히 듣는 아리랑이다. 주로 <경기아리랑>(일명 <서울아리랑>,<본조아리랑>)을 모태로 신민요조의 곡조를 차용하여 만든 노래로서, 가사 역시 나운규의 창작이 가미되었다. 고종 임금이 즐긴 아리랑은 나운규 <아리랑>의 모태가 된 <경기아리랑>이었을 것이다." (289~290쪽)

 

<목차>

어린 왕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나 - 오수창
왕실 호칭의 이모저모 - 김세봉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을까 - 김형자
흥선대원군은 왕처럼 행세하였는가 - 연갑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닭 - 오종록
임진왜란은 과연 이긴 전쟁인가 - 정홍준
사간원 헌납(獻納) 김조선(金朝鮮)의 하루 - 최이돈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일생 - 차미희
백성들이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는가 - 구덕회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었을까 - 남지대
17세기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들 - 한명기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배우성
오랑캐, 왜구보다 더 무서웠던 역병 - 신동원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 놀이 - 심승구
조선시대 화원들의 이력서 - 신병주
판소리는 과연 민중예술이었나 - 정재훈
조선시대 사람들의 패션 감각 - 김정미
보우는 요승인가, 성인인가 - 남동신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주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 노대환
조선 군대는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웠을까 - 노영구
격조 있는 읽기, 쓰기, 보기 - 오향녕
조선은 주자학 때문에 망했을까 - 송양섭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이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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