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화성행차

저자
한영우 지음
출판사
효형출판 | 2007-04-2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 르네상스의 진수, 정조의 화성행차 반차도를 통해 정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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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 중에 마지막으로 가장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대목이 바로 정조대왕의 치세 기간이 아닐까 싶다.


정조의 통치 기간 중에서도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 방문을 함께 하기위한 행차는  멋있다는 생각을 넘어 더 이상 오지 않을 태평성대에 대한 아쉬움으로 남기도 한다.


이런 아쉬움을 한 켠으로 접고 그 당시로 돌아가서 임금의 행차가 어떤 모습으로 지나갔을까를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이 행차를 기록한 반차도를 선명하게 채색하고 설명도 달아 놓은 것이 위의 책이다.


정조가 왜 화성을 만들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들여 화성으로 행차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읽고 있으면 이 행차를 마치고 5년 뒤 요절하는 정조의 모습이 더 안타깝게 여겨진다. 그가 만들고자 했던 조선의 모습이 조금 더 실현되었더라면...하는 상상만 할 뿐이다.


조선시대 의궤의 상세한 기록이 가지는 가치는 이제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의궤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전혀 없다고 봐도 될 정도이다. 매체에서만, 글로만 전해들은 대단한 유산인 의궤의 그림을 직접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해 놓은 책이 있어 다행이다.

 


정조가 왜 화성을 건설했는가. 이 대답을 가장 확실하게 해주는 것은 '화성(華城)'이라는 이름 자체다. 이 이름은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編)>에 나오는 '화인축성(華人祝聖)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화(華)라는 지방에 봉해진 어떤 사람이 요(堯) 임금에게 수(壽)와 부(富) 그리고 다남(多男)을 기원하자, 요임금은 "수(壽)는 욕됨이 많고, 부(富)는 일이 많으며, 다남(多男)은 걱정이 많아서 싫다. 이 세 가지는 덕(德)을 기르는 까닭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말하자면 '화성'이라는 이름에서 정조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황실의  부귀와 번창을 기원하는 도시요, 와아의 입장에서는 요 임금처럼 덕(德)을 펴는 도시라는 두 의미를 함축하려 하나 것이다. 결국 왕은 자신이 요 임금 못지 않은 성인(聖人)이라는 점을 신민( 臣民)에게 보여주기 위해 화성을 건설했다고 볼 수 있다.  (25쪽)




정조는 왜 이토록 행행을 많이 가졌을까. 물론 그것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왕이 행행 중에 행한 일을 살펴보면, 행행의 목적이 효심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조는 행행 중에 3355건의 상언(上言)이나 격쟁(擊錚)을 처리했다. 그러니까 한 번 행차중에 평균51건의 민원 (民怨)을 처리했다는 이야기다. (27쪽)



<오타 >
말을 탄 채 각종 안기를 연주하는 악대만도 115명에 달하여 → 악기를  (30쪽)

 

 

 

<목차>

1.정조 조선왕조의 르네상스를 이끌다
정조는 어떤 군주를 꿈꾸었는가
 왕을 왕이게 하리라 - 왕권강화와 민국사상
 새 시대의 흐름에 앞장서다 - 정조의 이용후생 정신
정조에게 화성은 무엇이었나
 왕의 기상과 포부가 천하를 호령하니
 집집마다 부유하고, 사람마다 화락하는 낙원도시
 노동자의 이름 하나도 귀히 여긴 왕의 마음
정조는 왜 화성을 자주 방문했는가

2.<반차도>
화려하고 장엄한 화성행차의 기록, <반차도>

3.단 8일을 위한 1년간의 준비
사치하거나 낭비하는 자 엄히 다스릴지니
새 길을 열고 다리를 놓다
 서울과 화성을 잇는 신작로의 건설
 왕이 직접 배다리 설계에 나서다
 조선시대 다리 역사에 한 획을 긋다

철저한 준비 끝에 출발 전야를 맞다

4.화성행차, 그 8일간의 기록
첫째 날(윤2월9일)
 새벽을 여는 1킬로미터의 장엄한 행력 - 창덕궁
 날 좋고 어머니 만강하니 - 노량행궁, 시흥행궁
둘째 날(윤2월10일)
 궂은 날을 무릅쓴 행군 - 시흥, 청천평, 사근참행궁, 지지대고개. 진목정
 경사스런 봄비가 왕의 도착을 알리네 - 화성행궁
셋째 날(윤2월11일)
 유학 진흥의 뜻을 밝히다 - 화성향교 대성전
 문무과 별시를 열어 인재를 뽑다 - 화성행궁의 낙남헌
 회갑잔치 예행연습을 열다 - 봉수당
넷째 날(윤2월12일)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하늘에 맺히다 - 현륭원
 정조의 친위부대, 야간훈련에 나서다 - 서장대
다섯째 날(윤2월13일)
 성대한 환갑잔치가 열리다 - 봉수각
여섯째 날(윤2월14일)
 쌀을 나누며 가난한 백성과 함께 기뻐하다 - 신풍루
 노인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 - 낙남헌
 활을 쏘며 문무겸주의 군주상을 보이다 - 득중정
일곱째 날(윤2월15일)
 귀경길에 오르다 - 화성을 떠나 시흥으로
여덟째 날(윤2월16일)
 백성들을 가마 앞으로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다 - 시흥
 만인의 노고를 치하하며 돌아오다 - 노량 용양봉저정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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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기원

저자
존 B. 던컨 지음
출판사
너머북스 | 2013-03-1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한국사의 통설, 조선왕조의 ‘신흥 사대부’ 건국론에 도전한다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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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세력에 의해 조선이 세워졌다는 관점을 부정하고 새롭게 조선의 건국 세력을 분석한 책이다.


우선 저자가 조선 건국을 분석하는 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지방분권적 사회, 정치적 질서에서 중앙관료적 귀족 지배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앙집권적 체제로 변화했다'는 시각으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을 보고 있다.


책에 따르면 '신흥사대부'라는 세력의 정의는 불분명하고, 조선 초기에 건재한 건국세력에 포함된 가문은 고려에서 이미 중앙 관료로 권력을 가지고 있던 유력한 가문이었다는 것이다.


즉 조선의 건국 세력은 기존의 고려 권력세력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고 기존 세력이 중앙집권화라는 명분을 강화하면서 이루어낸 변화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내재적 발전론의 지지자들은 지방 향리에서 기원해 고려의 옛 중앙 귀족을 대체한 '신흥 사대부'가 조선왕조를 건국햇다고 주장하지만, 필자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의 높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새 왕조 건국에 수반된 개혁의 본질을 근거로, 조선의 건국은 지방자치를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인 관료적 정치제도를 수립하려는 고려 전기의 노력이 거둔 궁극적인 열매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건국은 지방에 근거한 향리 출신의 지배층이 타락한 옛 중앙 귀족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중앙의 관료적 귀족이 지방자치적이며 향리 중심적인 신라-고려 교체기의 옛 제도에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든 것이다." (398~399쪽)


이 책은 존 B. 던컨이라는 미국인 교수가 썼다. 외국인이 쓴 한국 역사에 대해서는 처음 읽은 책이다. 영어로 쓰여진 것을 번역한 것이어서 번역문의 흔적이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박사논문 수준에 버금가는, 어쩌면 그보다 더 발전된 논문의 내용인지라 일반인의 이해 수준을 넘기도 해서 세세한 내용보다는 큰 맥락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 중간에 책을 덮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자의 생각을 알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글은 아니지만 읽을만 한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아래는 책에서 뽑은 발췌문이다.  

 


 

10세기 후반 광종이 옛 군사 연합을 무너뜨리고 관료제도로 이행하는 개혁을 실시한 뒤 비교적 소수의 문반 귀족가문이 흥기해 조정을 지배했다.


12세기 전반 그들은 세습적 중앙 관원으로 발전했는데, 고려 사회의 귀속적 전통과 그들이 중앙 조정에 근무하는 유인책으로 받은 특권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12세기 무렵에는 넓은 사유지를 축적해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을 스스로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신의 집권으로 일족이 숙청되고 정치권력을 크게 상실했지만, 그 기간에도 사회저거, 행정적 지배층의 위치를 계속 지켰다.


요컨데 고려 후기 조정을 지배한 주요 가문은 무신란 이전 문반이 지배한 체제와 상당한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


고려 전기와 후기 모두 주요 가문은 일정한 관료적 경향을 나타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과거제도는 조정에 입사하는데 선호된 수단이 분명했다.


또한 저명한 관원의 경력 유형을 연구한 결과, 가문적 배경에 상관없이 그들은 20년 이상 근무한 뒤에야 진정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재추에 올라가는 정규적 승진 경로를 밟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왕조의 주요한 중앙 관원 가문이 뻗어 나온 기반 - 호족과 향리층 - 은 지방 귀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에 기반을 둔 가문의 다수는 더 이상 지방에 있는 조상의 근거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고, 중앙 관원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사유지에서 독립적인 경제력의 기반을 발전시켰으며, 대부분 서로 결혼하면서 200년 넘게 대대로 중앙관원을 배출했다.


-- 2장 중앙 관료적 귀족의 흥기 <결론>


조선 전기 지배층의 구성과 사회적 기원, 경제적 기원, 경제적 기반에 관련된 이런 검토는 고려와 조선 시대 사이에 상당한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조선 전기의 가장 주요한 가문의 압도적 다수는 고려의 저명한 중앙 양반의 후손이었으며, 노비와 소작농이 경자한 대토지를 계속 소유했다.


-- 3장 왕조 교체기의 양반 <결론>


고려 후기는 2개의 주요한 문제에 부딪혔다. 하나는 왕권의 약화였는데, 국가 자원의 많은 부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했고 최씨 무신 집정과 원의 지배로 권위가 상실되었다 다른 하나는 자아를 인식하는 중앙 관료적 귀족이 체제 안에서 흥기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지향한 기본적 제도의 구조는 여전히 신라-고려 교체기에 지방 호족이 가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왕권이 약화된 좀더 근본적 이유는 국왕이 국가의 자원에 접근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엇다 그 원인 또한 낮은 수준의 사회적 분화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의 경제는 비교적 발달하지 않았으며 대량의 가용 자원을 산출 할 수 있는 상당한 규모의 공인과 상인이 없었다. 이것은 국가 자원의 대부분이 토지와 백성이라는 의미였다.


자원에 대한 국왕의 접근은 12세기부터 중앙에 기반을 둔 가문 사이에서 대규모의 농장이 흥기하면서 훨신 더 제한되었다. 만성적인 재정 악화의 상황은 양반이 지속적으로 자원을 착취하고 군비로 비축해놓은 가용 자원을 사용하게 만든 외국 침략자가 지방을 초토화하면서 왕조 말엽의 위기로 바뀌었다.


이처럼 왕조의 제도는 향리에게 특권적 지위를 보장했지만, 그들은 중요한 사회경제적 권력 기반을 갖지 못한 뿌리 뽑힌 존재가 되고 말았다.



-- 4장 고려 후기의 제도적 위기 <결론>


조선 건국에 수반된 개혁은 주요하나 중앙 양반 가문의 실제적인 경제,사회,정치적 이익을 반영한 것이 분명했다.


재정적으로 새 왕조는 수조지 제도를 개혁하고 양인 인구를 더욱 강력히 통제하는 다양한 조처를 시행해 고려 시대보다 좀더 많은 가용 자원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국왕의 권력을 강화하고 중앙 체제를 견고한 기반 위에 놓은 그 박의 개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지배적인 사회집단인 양반이 여전히 광대한 토지와 인적 자원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새 왕조는 조정에서 관직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상당히 줄이는 방법으로 지배층의 참여 자격을 다시 정의했다.


고려 전기에는 대부분의 국가 자원이 지방 주요 가문의 세습적인 통제 아래 있었고 왕조의 지방행정은 주군과 주현, 속군과 속현, 향,소,부곡으로 이뤄진 고도로 서열화된 체계였던 것과 달리 조선 전기에는 토지와 인적 자원 모두 국가의 통제력이 훨씬 커졌으며 중앙의 직접적인 감독 아래 지방행정을 두는 좀더 정규적인 제도라는 특징이 있었다. 따라서 고려와 비교해서 조선은 더 많은 가용 자원을 가진 더 분화된 사회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1392년의 왕조 교체에 따른 제도 개혁은 새로운 지배층의 요구를 수용한 혁명적 변화라기보다는 앞선 몇 세기 동안 점진적으로 발달해온 관료적 귀족의  중앙 양반층이 가진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제도를 재편한 것이었다.


-- 5장 개혁과 왕조 교체 <결론>

 

 

 

 

 

 

<목차>

1장 고려의 정치제도

중앙 정치제도
왕권 │ 중앙 관료 제도의 창출 │ 무신 치하의 제도 개혁
지방행정 제도
지방의 사회·정치적 질서 │ 중계적 지방 관서를 설치하려는 시도 │ 군현의 통제
자원을 둘러싼 갈등
전시과 │ 그 밖의 토지자원들
결론

2장 중앙 관료적 귀족의 흥기

고려 전기의 중앙 관원층
고려 전기의 주요 가문들 │ 주요 가문의 기원 │ 등용 제도와 사회적 지배층 │ 중앙 관원의 경력 유형 │ 요 가문의 융성
고려 후기의 주요 가문들
고려 후기의 중앙 관원층 │ 등용 제도 │ 경력의 유형 │ 권문세족과 사대부 문제
중앙 가문의 경제적 기반
고려 전기 │ 고려 후기
결론

3장 왕조 교체기의 양반

조선 개창기의 중앙 관원층
1392~1400년의 중앙 관원층 │ 태종 초반(1401~1405)의 중앙 관원층 │ 지파의 연합 │ 등용 제도
양반 가문의 내부 구조
조선 전기 주요 가문의 세계 │ 주요 가문의 혼인 관계
15세기 중반의 주요 양반 가문들
15세기 중반의 관원층 │ 15세기 중반의 과거제도 │ 주요 중앙 양반 가문
조선 전기 양반의 경제적 재원
결론

4장 고려 후기의 제도적 위기

권력투쟁
고려 후기 정치제도의 구조 │ 원 간섭기의 정치권력 │ 원 간섭기 이후의 정치권력 │ 개혁의 시도
자원의 장악을 둘러싼 투쟁
외침 │ 중앙 세력의 지방 수탈 │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
신분제도를 유지하려는 투쟁
문제의 기원 │ 신분제도를 유지하려는 노력
결론

5장 개혁과 왕조 교체

재정 개혁
과전법 │ 자원을 창출하고 통제하려는 국가의 시도
신분제도의 재정립
지방행정의 개편 │ 지배층의 감축
중앙 정치제도의 재편
정치 개혁: 첫 번째 국면, 1392~1400년 │ 정치 개혁: 두 번째 국면, 1400~1405년
결론

6장 개혁의 이념

사상의 복잡성
고려 전기부터 중기의 사장과 고문 │ 왕조 교체기의 고문과 정주학 │ 조선 전기에 남은 당풍의 흔적
과거제도를 둘러싼 갈등
고려 후기의 과거 │ 조선 전기의 과거 │ 유교와 개혁
결론

7장 몇 가지의 최종적 고려 사항

연구 성과의 요약
해석과 비교의 결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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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 기행

저자
황인희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0-10-25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두 발로 짚어보는 조선 역사! 왕의 무덤으로 떠나는 역사 여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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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조선 왕릉 기행이다. 기행이라는 말에서 눈치를 챌 수 있는데, 왕릉에 대한 시간순의 설명이 아니라 여행을 염두에 두고 왕릉을 둘러본다는 생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519년에 대한 시간순의 개념이 부족하면 뒤죽박죽인 시간 순서가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이왕 여행의 개념을 넣었으면 왕릉군 별로 간단한 지도라도 삽입해서 동선을 구별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친절함은 없다. 아쉬운 점이다.

 


 

익릉 :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
일반적인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정면에서 볼 때 세 칸, 옆면에서 볼 때 두 칸짜리 건물인데 익릉의 정자각은 건물의 사방에 익랑이라는 것이 더 붙어 있습니다. '날개처럼 붙은 복도'라는 뜻인데요, 이 익랑 때문에 정면이 다섯 칸, 옆면이 다섯 칸으로 커다란 건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익랑이 있는 건물 구조는 중국식입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정면 처마에 치마처럼 방풍판이 달려 있는데 이는 우리 고유의 양식입니다. 바로 윗대 현종의 숭릉(동구릉 소재) 정자각이 중국식의 팔작지붕에 방풍판이 없는 형태였던 걸 생각하면 다시 우리식으로 돌아온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42쪽)


경릉 : 덕종(의경세자,세조의 맏아들)과 소혜왕후
덕종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목조, 익조, 탁조, 환조)을 제외하고는 조선 최초의 추존왕이지요. 세자의 신분으로 죽은 것도 조선 개국 이래 의경세자가 처음이었습니다. 세조가 대신들과 능제를 의논한 결과, 왕릉에서 무석인이 서 있는 3단계 장대석을 생략하고 문석인만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덕종의 능은 추존왕릉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46쪽)


예릉 :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
조선의 능침은 초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나누어 중계에 문석인을, 하계에 무석인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하였습니다. 또 예릉의 특이한 점은 다른 능에서는 중계에 있던 장명등석이 하계의 끝부분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장명등석이 앞으로 나온 이유는 하계 부분이 앞으로 길게 나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장명등석 자리가 사초지의 정중앙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명등석은 다리가 길어졌고 지붕 위에는 둥근 물결 무늬가 몇 겹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조선 왕릉의 장명등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입니다. (79쪽)


정자각도 크고 웅장하며 처마마루 위의 잡상도 다른 왕릉보다 두 개 더 많은 다섯 개가 올라앉아 있습니다.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에, 백성은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도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왕릉을 만든 사람은 다음 왕 고종 때 섭정을 한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오랜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와아권을 강화하려면 왕실의 권위부터 세워야 했기에 왕릉을 최대한 호화롭게 꾸민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석물들은 중종의 정릉, 순조의 인릉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느라 버리고 간 석물들을 재활용한 것들입니다 문무석인과 호석, 마석은 정릉의, 나머지 석물은 인릉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자각까지 뻗어 있는 참도가 이전 능과는 달리 3단인 것도 특이합니다. 중앙이 신도이고 양 옆 길이 어도인데 철종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그의 능도 황제릉의 형식을 다른 것입니다. (80쪽)


희릉 :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
희릉의 정자각은 측면에서 봤을 때 앞부분 회랑이 세 칸입니다. 전통적인 정자각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회랑으로 되어 있는데 희릉부터 세 칸 짜리 익랑이 등장했습니다. 정자각의 왼쪽에 있는 예감에는 다른 능에 없는 뚜껑이 있습니다. (86쪽)


효릉 :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
혼유석과 장명등석, 한 쌍씩의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등 석물들이 서 있는 것은 다른 능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효릉의 정자각 옆에는 태종의 헌릉 이후 왕릉에서 사라졌던 소전대가 있습니다. 소전대는 제향 때 돈을 태워 날리는 공간이고 예감은 축문을 슨 나무판을 묻는 곳입니다. 제향을 끝내고 전 해에 묻었던 축판을 꺼낸 후 그해 새로 나온 축판을 묻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제향 때 종이에 축문을 서서 예감에서 태우지요. 소전대가 사라진 후로는 예감이 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효릉에서처럼 소전대와 예감이 한꺼번에 발견됨으로써 그 역할이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5쪽)


온릉 :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
온릉은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 능입니다. (107쪽)


공릉 :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한씨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는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공릉의 참도는 ㄱ자로 꺾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아마도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능을 조성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117쪽)


영릉 : 영조의 큰아들 진종(효장세자)과 그의 비 효순왕후 조씨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는 다른 능과 달리 신도와 어도의 두 단이 아닌 한 단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대신 정자각 앞쪽에 박석이 넓게 깔려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이 두 채 서 있는데 그중 능침 쪽에 있는 작은 비각에는 효장세자의 묘임을 알리는 옛날 비가 서 있습니다. 아래쪽 큰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진종대왕의 능임을,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의 진종소황제의 능임을 나타내는 비석입니다. 세자 묘에서 왕릉으로, 황제릉으로 바뀌어온 영릉의 역사를 말해주는 비석들입니다. (127쪽)


장릉 :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
조선 왕릉의 참도 중 가장 넓은 장릉의 참도.(131쪽)


장릉은 원래 현재의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왕비의 능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두었고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준비된 자리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뤄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서 영조 때인 1731년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천장을 했습니다. 천장을 하면서 합장릉을 만들었는데, 옛 능의 병풍석, 난간석 등이 새 능과 규모가 맞지 않아서 옮겨오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습니다.따라서 장릉에서는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136쪽)


장릉은 비공개 능인데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주차장이나 진입 도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137쪽)


태릉 :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
태릉의 능침은 태조의 건원릉보다도 더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문무석인의 키가 345cm로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큽니다. 이를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칠 만큼 당시 그 규모가 문젯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145쪽)


강릉 :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태릉에서 퇴계원 쪽으로 가다보면 삼육대학교가 있습니다. 그 정문 왼쪽으로 철문이 하나 보이는데 그곳이 강릉의 입구입니다. 강릉은 비공개 능입니다. (147쪽)


정릉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또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능침 아래 있는 소전대입니다. 소전대는 제향을 마치고 축문을 태우는 석물인데 역시 조선 초기에만 있었던 양식입니다. 정릉의 소전대는 원래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2008년 정릉 숲 속 약수터에서 발견되어 제자리를 찾은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163쪽)


광릉 :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광릉 홍살문에 들어서면 정자각 뒤 양쪽으로 아득하게 높은 언덕이 보입니다. 입구에서 보기에 왼쪽 언덕이 세조이 능이며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입니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이지만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따로 모시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태의 동원이강릉입니다.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광릉에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183쪽)

 

의릉 :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
홍살문 들어서 정면으로 보이는 정자각은 좌우에 익랑이 달려 있는 다섯 칸짜리 건물입니다. 일반적인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정면에서 볼 때 세 칸 건물인데 현종 무렵부터 들어온 중국풍의 영향으로 익랑이 붙은 정자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185쪽)


의릉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왕과 왕비의 능침이 한 언덕에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능의 형태를 동원상하봉이라 합니다. 좌우로 나란히 쌍릉을 만들면 능침이 정혈을 벗어나는 경우 이렇게 상하로 조성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정기가 한곳으로 흘러내리니 그 지점에 상하로 묘를 썼다는 것입니다. 위쪽에 경종이 묻혀 있고 아래쪽에 왕비가 잠들어 있습니다. (186쪽)


수릉 : 추존왕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 조씨
수릉은 하나의 능침에 혼유석도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익종과 신정왕후의 합장릉입니다. 왕릉의 앞 공간은 초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나뉘고 문석인은 중계에, 무석인은 하계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단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분 제도가 변하면서 반영된 변화입니다. (200~201쪽)


현릉 :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현릉에 가면, 홍살문, 정자각과 비각도 모두 하나이지만 왕과 왕비의 능침만 각각 다른 언덕 위 따로 만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합니다.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능에서 처음 쓰인 양식입니다. 문종과 현덕왕후 두 사람 모두 세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어덯게 동원이강릉이 될 수 있었을까요? (203쪽)


목릉 :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목릉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의 터였습니다.
(중략)
선조의 목릉도 원래 건원릉의 서편 현재의 경릉 자리에 따로 조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장인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실한 산릉공사를 한 탓에 병풍석이 기울어지자 심명세라는 사람이 목릉에 물이 차서 불길하니 능을 옮겨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장을 하려고 능을 파보니 흙이 보송보송한 길지여서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번 파버린 능을 다시 덮을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현 위치로 천장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232쪽)


휘릉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휘릉의 정자각을 보면 모습이 여느 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정자각은 정면에서 봤을 때 세 칸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휘릉의 정자각은 좌우로 날개 격인 익랑이 붙어서 다섯 칸의 건물입니다. 이는 현종과 숙종 때 유행하던 중국풍의 건물 양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241쪽)


원릉 :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
(사진설명)원릉부터 중계와 하계를 구별 짓는 단계석이 사라졌다. 문무관의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이다. (244쪽)


영조는 원래 서오릉의 홍릉, 원비 정성왕후 옆에 자신의 묏자리를 정해 놓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 가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묻혔습니다. 현재 동구릉의 원릉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봉분을 열고 천장한 파묘한 자리이지요. 당시 봉분을 열어보니 별 문제 없이 깨끗하여 영릉도감의 책임자가 파직되기도 한, 부정 탄 자리였습니다. 심지어는 경종의 왕릉 택지로 추천되었을 때 영조가 국장에 어떻게 파묘하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250쪽)


경릉 : 헌종과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경릉은 그 조성 과정에 씁쓸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선조의 목릉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목릉에 물이 차고 불길하다는 상소에 따라 목릉을 천장했지요. 그러나 능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불길론'은 해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묘를 썼다가 파헤친 자리는 기가 빠져나가 흉당이 되어버리지요. 그런데 효현왕후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왕이 살아 있을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곁에 자리를 마련하라는 유언이 없으면 왕을 왕비 곁에 장사지내지 않는 것이 전통 조선 왕릉제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헌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안동 김씨들은 새로운 길지를 물색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열세 군데나 다녔지만 결국 이곳을 십전대길지라 하면서 최고의 명당으로 추천했습니다. 파묘한 자리는 흉당의 요소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257쪽)


홍릉 :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점은, 사초지 위가 초계 중계, 하계의 구분이 없고 석물들이 사초지 아래 참도 좌우로 늘어서 있다는 점입니다. 또 정자각 대신 일자형의 건물인 침전을 세웠습니다. 침전은 임금의 숙소라는 뜻입니다. 중국에서는 능이란 황제가 죽어서도 나라를 통치할 지하 궁전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황제릉을 본떠 만든 홍릉과 유릉에는 침전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의 정자각과는 그 용도가 다른 건물이지요. 지붕 형식 또한 왕릉처럼 맞배지붕이 아니고 팔작지붕으로 바뀌었으며,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284쪽)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호입니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을 이왕가로 격하시켜버린 일본은 고종의 능호를 따로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성황후와 합장하고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건을 겪어내고 끝내 나라가 망하는 것까지 봐야 했던 고종, 망국의 황제가 능호를 갖는 방법은 이미 정해진 황후의 능호를 함께 쓰는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284~285쪽)


유릉 :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방해로 능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고종과 같은 편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별세하여 경기 용마산에 안장되었던 순명효황후의 묘소 유강원을 유릉으로 추봉했는데 이 유릉을 지금의 금곡으로 천장하여 순종과 함께 합장하여 간신히 순종도 유릉이라는 능호를 얻게 된 것입니다. 훗날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도 유릉에 합장되어, 유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 하나에 세 사람이 합장된 동봉삼실형의 능이 되었습니다. (291쪽)


사릉 :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
사릉은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붙여진 애틋한 사연이 담긴 능호입니다.. 단종의 영월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 살아서 애틋하게 이별한 어린 부부의 한을 죽어서나마 풀어주도록 두 능을 합치자는 의견이 더러 있었지만 문화재 보존의 차원에서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양주시와 영월군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자매 결연하고, 사릉과 장릉에 소나무를 교차 식수했다고 합니다. 사릉에 찾아가면 영월 장릉에서 온 소나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찾아볼 만합니다.


(중략)


사릉은 현재 비공개 능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참배만 하고 나온다면 간단한 절차를 거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99쪽)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순조의 능은 원래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종 때 자리가 불길하다는 주장이 있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고, 순원왕후가 별세하자 이곳에 합장되었습니다. 합장릉에는 봉분은 하나라도 혼유석을 두 개를 놓아 두 분을 모셨다는 표시를 하는데 인릉에는 혼유석이 하나뿐입니다. (352쪽)


사초지 오른쪽에 계단이 있어 위까지 올라가볼 수는 있지만 능침 앞까지 가서 참배하려면 관리소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인릉의 언덕 너머로 중요 국가 기관이 있어 사초지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355쪽)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문종과 단종 시대를 지내고 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실은 첫째 아들이 일찍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문종과 그 아들 단종,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도 모두 맏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세조는 물길이 지나는 곳에 쓴 세종의 능 자리가 맘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로 천장이 무산되었지만 세조는 후계자인 예종에게 영릉을 천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새 능 자리를 물색하게 했고 이곳 여주로 영릉을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393쪽)


세종전 앞뜰에는 측우기, 물시계, 관천대 등이 진열되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재실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훈민문을 통과하여 홍살문을 들어서면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느낌이 듭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의 능으로 제대로 보존되었다기보다는 도심 한복판의 공원을 만들어놓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영릉 성역화를 하면서 왕릉에 너무 많은 손질을 더한 탓입니다. 일단 홍살문과 정자각은 일자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꺾여 있는 것부터 예에 어긋나 보입니다. 복원하면서 자리를 잘못 잡은 듯합니다. 또 세종은 분명 왕이었는데 참도가 황제의 참도인 3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종대왕을 황제로 대접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참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무조건 많이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고증을 통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은 못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394쪽)


영릉 :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영릉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보통 홍살문 밖에 있는 금천교가 홍살문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물길이 정자각과 가까이 흐르는데 그 자연물을 거스르지 않고 능을 조성했기 때문이겠지요. 또 동계도 신도와 어도로 이어진 계단 두 개만 있어야 하는데 계단이 세개입니다. 세종의 영릉에 참도를 세 단으로 만들고 동계를 세 개로 만들 때의 영향으로 계단이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영릉은 사초지 위에까지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단 그 위에 일부러 만들어놓은 '포토 라인'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401쪽)


<오타>
(257쪽)
효정왕후는 1903년 후사 없이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58쪽)
삼연릉이 된 사연은 더축 처절합니다. 1904년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73세로 세상을 떠나자 효현왕후 곁에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 효정왕후의 승하 연도가 1903년인가 1904년인가???

두산백과사전 : 1903년 덕수궁 수인당에서 소생없이 73세로 사망하였다.

 

 

 

 

 

 

 

<목차>

책을 내면서
왕릉 기행을 시작하기 전에

제1일 서오릉-숙종을 둘러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는 가족 묘역
명릉(明陵) 익릉(翼陵) 경릉(敬陵) 홍릉(弘陵) 창릉(昌陵)

제2일 서삼릉·온릉-식민지 시대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왕실의 공동묘지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 온릉(溫陵)

제3일 파주삼릉·장릉-전란에 시달리거나 요절한, 비운의 왕과 왕비들의 능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제4일 태강릉·정릉·연산군묘-빗나간 욕망이 휘둘린 왕과 왕비들의 능묘
태릉(泰陵) 강릉(康陵) 정릉(貞陵) 연산군묘

제5일 광릉·의릉-천연 생태박물관 수목원까지 남겨준 최고의 명당
광릉(光陵) 의릉(懿陵)

제6일 동구릉-아홉 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수릉(綏陵) 현릉(顯陵) 건원릉(建元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혜릉(惠陵) 숭릉(崇陵)

제7일 홍유릉·사릉·광해군묘-화려해서 더욱 서글픈 두 황제의 능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광해군묘

제8일 선정릉·헌인릉-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선릉(宣陵) 정릉(靖陵) 헌릉(獻陵) 인릉(仁陵)

제9일 융건릉·장릉-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
융릉(隆陵) 건릉(健陵) 장릉(章陵)

제10일 영녕릉·영월 장릉-도성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난 왕릉들
영릉(英陵) 영릉(寧陵) 장릉(莊陵)

부록 1 -조선 왕조 세계도(世系圖)
부록 2 -조선 왕릉 제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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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2

저자
이우상 지음
출판사
다할미디어 | 2009-06-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왕릉을 중심으로 조선왕조와 그 역사의 뒷이야기를 풀어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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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구성은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재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왕릉의 위치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닌다. 짤막한 역사의 내용과 함께 각 왕의 특징을 왕릉과 함께 엮어서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왕릉의 이름과 주인공, 그리고 간략한 특징들을 인용한 것이다. 독자로써 다음에 해당 왕릉을 찾을 때 한번 쯤 다시 보고 가면 좋을 듯한 특징을 나름 발췌해보았다.

 


광해군묘

그는 1641년, 귀양 생활 18년 만에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을 어머니 공빈 김시의 묘 발치에 묻어달라고 했다. 조정은 유언에 따라 남양주에 있는 공빈 김씨 묘 아래쪽에 묻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의 자손들로 하여금 무덤을 돌보게 했다. 지금은 사적으로 등록은 되어 있으나, 돌보는 공익요원 한 명 없는 외로운 묘이다. (22쪽)

장릉 : 인조와 인열왕후

인조가 누워 있는 장릉은 비공개 능이다. 공개 못할 특별한 비밀이 있어서라기보다 워낙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 역정을 대변하듯 외롭고 쓸쓸하다. 관리사무소에 말하면 관람이 가능하다. 동조 세력과 함께 혈기왕성하게 반정을 일으켰으나 재위 내내 불우했다. 정묘년, 병자년의 전란을 호란(오랑캐의 난)이라고 겨우 기록했지만, 참담한 굴욕의 역사다.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쌍릉이다. 제4대 세종의 영릉英陵과 7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원래 효종의 능은 1659년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 근처)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그 다음해에 인선왕후가 죽자 정혈에 묻는다는 풍수 이유로 왕릉 앞에 인선왕후의 능을 써서 앞뒤로 나란한 쌍릉을 이루었다. 동원상하봉이라는 특이한 모습이다. (52쪽)

숭릉 : 현종과 원비 명성왕후

숭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정자각에 팔작지붕을 얹었다. 사대모화, 성리학이 절정을 이루던 시대이니 전래의 맞배지붕 정자각이 아닌 중국 양식을 흉내 낸 것이다. 우리 고유의 정자각은 지붕 양쪽 옆면을 단정하게 정돈한 맞배지붕 형식이다. 검약, 검소, 단아함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그러나 숭릉의 정자각은 지붕이 불거져 나온 팔작지붕이다. 맞배지붕 양 옆으로 지붕을 덧달아 놓아 하늘 위에서 보면 한자의 < 八>자 모양이어서 팔작지붕, 팔각지붕이라고 부른다. 거기다가 정자각엔 익랑(문의 좌우에 잇대어 지은 행랑)에 기둥이 하나 더 붙어 있다. 능호인 '숭崇'자 역시 모화숭배자들이 작명한 것 같다. (66쪽)

명릉 :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명릉에 들어서면 능의 배치가 이상하다. 정자각에서 바라보면, 왼쪽 위 외따로 능이 하나 있고, 오른쪽 아래 정자각과 균형이 맞는 위치에 쌍릉이 있다. 왼쪽부터 제2계비 인원왕후, 숙종, 제1계비 인현왕후의 무덤이다. 이들을 통틀어 편의상 명릉이라 하는데, 법도에 맞지 않다. 동원이강 양식으로 본다면, 서열이 가장 낮은 제2계비가 상석이고 왕과 제1계비가 말석인 셈이다. 유교 풍수 국가인 조선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숙종 왕릉은 쌍릉에 해당되며 왼쪽에 있는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은 단릉 양식이다. 정자각도 없는 능이다. 사연은 이렇다.

...(중략)...
제2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 외따로 초라한 것은 그녀의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오래 살았다.
....(중략)...
숙종이 승하하자 청상과부 인원왕후는 33세에 왕대비(경종 재위시)에 올랐고, 37세 때(영조 재위시)는 자동적으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손자뻘인 영조와는 일곱살 연상이었다. 그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대왕대비 인원왕후는 1757년(영조33) 3월 26일 70세로 승하했다. 죽을자리, 죽을 시기를 잘 찾는 것도 복이다. 인원왕후는 그런 복이 없었다. 인원왕후보다 1달여 앞선 2월 15일,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65세로 승하했다. 정성왕후의 국장이 진행됐다.
...(중략)...
인원왕후는 영조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계모에 불과했다.


  영조는 대왕대비의 유택을 위해 경비와 인력을 들일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벌채 경비도 아끼고 정자각 건립 비용도 생략했다. 명릉 능역 하나 모퉁이를 살짝 오려내어 대왕대비를 안장했다. 가장 저렴한 왕릉 공사였다. 그래서 인원왕후의 능은 능호도 없고 정자각도 없다. (70~73쪽)


익릉 : 숙종 원비 인경왕후

능의 규모는 무엇에 의해 결정될까. 익릉은 서오릉 중에서 가장 장엄(?)하다. 능호에 썩 잘 어울린다. 홍살문 밖에서 바라보면 막 이륙하는 점보기 같다. 홍살문에서 장자각에 이르는 참도는 위쪽으로 경사지게 계단식으로 설치되어 있다 정자각 뒤로 능상이 우뚝 솟아 있다. 대단한 권력자의 무덤 같다. (90쪽)

의릉 :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그의 생애만큼이나 그의 무덤도 애달프다. 경종이 묻힌 의릉은 1962년부터 1995년까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했다. 재위시절 힘없는 왕이라 죽은 육신마저 남에게 의탁했다. 33년 동안 의릉 능역과 그 주변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청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기관이 왕릉 일대를 접수해 무단 사용했다는 비난이 있다. (101쪽)

혜릉 : 경종 원비 단의왕후

조선 왕릉은 대부분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누웠는데, 혜릉의 단의왕후는 서쪽에 머리를 두고 발을 동쪽으로 향하게 누워 있다. 능의 침향, 즉 시신의 머리를 어느 방향으로 두는가는 민족, 종교, 지역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동쪽, 남쪽으로 머리를 두는 예가 많았다. 고구려와 백제는 5~6세기부터 중국의 영향으로 북침하기 시작했고, 신라는 통일 이후 동침에서 북침으로 바뀌어갔다.

홍릉 : 영조 원비 정성왕후

영조가 미리 자신이 묻힐 자리를 마련해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할아버지를 이곳에 묻지 않았다. 영조가 묻힌 자리는 103년 전 효종이 묻혔다가 천장한 동구릉의 파묘 자리다. 조정의 논란 때문인가, 정조의 복수극인가? 풍수에서 파묘 자리는 혈이 파괴되어 흉지로 여긴다. 일반 백성들도 묘터를 잡을 때 기피하는 곳이다. (120쪽)

융릉 : 추존왕 장조와 경의왕후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었던 영우원을 수원의 옛 도읍 뒤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했다가 고종 때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이라 했다. (141쪽)

건릉 :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은 현륭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159쪽)

왕자와 공주, 후궁의 공동묘지 그리고 태실 집장지

서삼릉 경역 내에는 왕자와 공주, 후궁 등의 묘 46기가 있다. 이 중 회묘(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묘)와 경선군묘(소현세자 장남 묘) 이외의 묘는 후궁과 왕자, 공주 묘로 구분되어 집장되어 있다. 가로 세로 반듯하게 정렬한 무덤군이 보기에 참 민망하다. 국립묘지 병사들의 묘역 같다. 왕릉 경역 내에는 왕자나 공주, 후궁의 묘를 쓸 수 없다. 그런데 서삼릉에는 이렇게 많은 묘가 있다니? 사연은 이렇다.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왕직이 설치되었다. 이왕직에서는 서울•경기 일원에 산재한 왕자와 공주, 후궁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 한다는 명목 아래 서삼릉 경역 내 현 집장지를 선정했다. 일제강점기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유씨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15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하여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왕자묘로서는 고종의 제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그 많던 왕자와 공주, 후궁들은 어디로 갔나. 아직 서울•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여기 46기가 전부다. 역사에 이름이 올려진 이들은 번듯한 유택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갑남을녀처럼 사라졌다. (179쪽)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조선 제23대 순조와 비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1834년 순조가 왕위에 오른 지 34년 만에 승하하자 처음 파주 장릉(제16대 인조의 능) 곁에 능을 조성했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의론이 대두되어 1856년(철종7) 헌릉(제3대 태종의 능) 오른쪽 언덕(우강 右岡)으로 이장했다. 다음해에 왕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순조와 합장했다. 헌릉과 함께 헌인릉으로 불린다. (189쪽)

경릉 :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

경릉은 3개의 봉분이 나란히 조성된 삼연릉이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다. 겉으로 보기엔 참으로 고즈넉하다. 그러나 조성된 경위는 우울하다. 허약했던 청년 군주 헌종의 이력서다. 건원릉 서쪽 다섯 번째 줄기에 있는 경릉은, 원래 선조의 유택인 목릉이 있었다. 목릉을 건원릉 두 번째 줄기로 천장하고 비어 있던 자리였다. 헌종의 원비 효현왕후가 15세로 별세하자 이곳에 안장하고 능호를 경릉이라 붙였다. 6년 후인 1849년 헌종이 승하하자 효현왕후 곁에 묻었다. 왕이 살아 있을 때 왕비 곁으로 가고 싶다는 전교가 없으면 먼저 죽은 왕비 곁으로 가지 않는 것이 법도다. 안동김씨들은 길지를 물색한다고 열세 곳이나 다녔다고 둘러대며 추천한 능지가 여기다. 흉당으로 꼽히는 파묘 자리인데다, 헌종은 능호도 얻지 못했다. (203~204쪽)

홍릉 : 고종과 명성황후

42기의 조선 왕릉 중 홍릉(고종 능)과 유릉(순종 능)에만 없는 것은 뭘까? 답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표본인 태조의 건원릉부터 25대 철종의 예릉까지, 조선의 마지막 두 왕인 26대 고종과 27대 순종 능을 제외한 모든 왕릉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왕릉 입구인 홍살문과 봉분 사이에 자리한다.

  선대 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핵심 구조로 꼽힌다. 평면이 '丁'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홍릉과 유릉에는 정자각대신 ' 一'자 모양의 침전이 있다. 왜 그럴까? 비밀은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에 있다.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이후 왕릉 형식도 '一'자 모양 침전이 있는 중국 황제릉과 비슷해졌다. 
(215쪽)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1월 30일 남양주시 금곡에 능역을 잡고 산역을 시작했다. 같은 시각 청량리 홍릉에서도 능을 파기 시작했다. 2월 16일 명성황후가 먼저 금곡으로 이장되었다. 3월 3일 전날 발인한 고종은 명성황후와 합장되었다. 그들은 24년 만에 지하에 함께 잠들었다. 망국의 황제는 능호도 없다. 홍릉은 부인 명성황후의 능호이다. (227쪽)



유릉 : 순종과 원비 순명황후 및 계비 순정황후

유릉은 조선왕조 마지막 왕인 제27대 순종과 순명황후 민씨, 순정황후 윤씨의 3인 합장릉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릉이며 유일한 동봉3실의 합장릉이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52세로 승하해, 같은 해 6월 11일 이곳에 초장봉릉되었다. (250쪽)



(오류)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사람이 이세완의 부인? (p58)

--> 이세완의 부인이 종친이라서 이세완이 염습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아무리 종친이라지만 여인이 세자의 염습에 참여할 수 있을까???

 

 

 

 

<목차>

우리 시대에 왕릉이란 무엇인가

제15대 광해군과 문성군 부인 광해군묘
역사는 준엄한가, 너그러운가, 애석한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
왕이란 이름은 물려주기도 하고, 올려 바치기도 하네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 장릉
반정은 짧고 굴욕은 길다

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 예송논쟁에 휘말려 살다 간 불우한 여인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영릉
북벌의 영웅인가, 순진한 몽상가인가

소현세자 소경원
명분보다 현실을 중히 여기다가 고혼이 된 선각자

제18대 현종과 원비 명성왕후
숭릉 치적 쌓을 틈도 없이 예송논쟁에 시달린 왕 노릇 15년

제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명릉
여인천하 경연장의 외로운 감독, 숙종

희빈 장씨 대빈묘
애욕은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제19대 숙종 후궁 숙빈 최씨 소령원
무수리에서 왕의 여자,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

제19대 숙종 원비 인경왕후 익릉
이승에서는 박복했으나 유택은 웅장하네

제20대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의릉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제20대 경조 원비 단의왕후 혜릉
이름도, 흔적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어요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원릉
조선의 장수왕, 영조

제21대 영조 원비 정성왕후 홍릉
천하 명당에 누웠건만 옆구리가 시리다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영릉
아홉 살 나이에 정조의 아버지가 되다니?

추존왕 장조와 경의왕후 융릉
야속한 아비의 아들, 장한 아들의 아버지 사도세자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꿈을 펼친 수원 화성과 행궁
정조와 효찰 대본산 용주사

내시 무덤
왕의 손발, 왕의 그림자, 내시 이야기

궁녀 무덤
이름 없는 여인들, 여기 잠들다

왕자와 공주, 후궁의 공동묘지 그리고 태실 집장지
어이! 왕자, 공주, 차려! 가로 세로 줄 맞춰! 거기, 후궁도 마찬가지!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인릉
해는 서산으로, 조선의 역사도 함지咸池를 향해 가네

추존왕 익종과 신정왕후 수릉
조선의 마지막 희망, 촛불춤으로 지다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 경릉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삼연릉의 비밀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예릉
허수아비 왕의 사랑과 비극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홍릉
대원군의 아들, 명성황후의 남편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오
천인공노天人共怒란 말이 부족하다, 명성황후 시해弑害

흥선대원군묘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 흥선대원군

고종의 후궁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 영휘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 숭인원
아관파천의 행동대장 엄귀비와 나란히 잠든 핏덩이 황손
핏덩이 이진의 죽음

제27대 순종과 원비 순명황후 및 계비 순정황후 유릉
마지막 황제의 선물, 6·10만세운동

영친왕 이은과 비 이방자 여사 영원
격랑의 한일근세사를 살아온 영친왕 전하!

의친왕 이강과 비 김수덕 여사 묘
조선 왕조의 마침표, 비석조차 없는 의친왕의 무덤

에필로그 최상의 죽음은 법문이다

[부록]
▷조선시대 능·원·묘 일람
▷조선 역대 왕 생존연대 및 재위기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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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1

저자
이우상 지음
출판사
다할미디어 | 2009-06-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왕릉은 조선왕조 27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추존 왕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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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에 대한 책이다.

구성은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재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왕릉의 위치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닌다. 짤막한 역사의 내용과 함께 각 왕의 특징을 왕릉과 함께 엮어서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왕릉의 이름과 주인공, 그리고 간략한 특징들을 인용한 것이다. 독자로써 다음에 해당 왕릉을 찾을 때 한번 쯤 다시 보고 가면 좋을 듯한 특징을 나름 발췌해보았다.

 

 


 

 

건원릉 : 태조

건원릉, 혁명가 이성계가 누워있는 곳이다. 능호가 유일하게 두 글자다. 건은 하늘의 두 원은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뜻이다. (37쪽)
 
헌릉 : 태종과 원경왕후
남한에 있는 왕릉중 유일하게 문인석, 무인석, 석양,석호,석마가 다른 왕릉의두 배인 각 2쌍씩 설치되어 있다. 곡장 안의 석호,석양 석물이 총 16개다. 특히 능의 위패에는 석호 네 마리가 버티고 있다. 모두 바깥쪽을 향하고있다. 대단한 경호다. 능침의 옆에서 오른쪽을 내려다보면 경호는 더욱 심하다. 국가정보원이 거기 있다. 국가 최고의 정보와 방어력이 있는 곳이 아닌가. 태종의 성품과 어울리는 기관이 외호하고 있다. (79쪽)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이 처음부터 경기도 여주에 자리잡은것은 아니다.1446년 왕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을 왕의 수릉으로 삼았다가 141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다.(86쪽)

세조 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서거정 등이 반대하여옮기지 못하고예종 1년에 현 위치로 천장했다. (87쪽)

현릉: 문종과 현덕왕후
문종은 죽어서도 홀아비 신세를 겪었다. 현덕왕후가 세자빈 신분으로 단종을 낳고 죽자 경기도 시흥 군자면에 안장된다. 1450년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고 소릉이란 능호를 받는다. 1452년 문종이 종기가 터져 경복궁 강녕전에서 승하하자 건원릉 동남쪽 줄기에 묻힌다. 태조의 건원릉에 이어 동구릉에 들어온 두 번째 능이다. 이때 시흥에 있던 현덕왕후 능도 천장해 현릉은 합장릉이 된다. 여기까지는 좋다. 생전에 못 다한 부부의 금슬을 다시 잇는다. 그러나 다시 이은 금슬은 6년 만에 파국을 맞는다. 세조에 의해 현릉이 파헤쳐지고 썩을 대로 썩은 왕후의 시신은 시흥 군자 앞 바닷가 10리 바깥에 내팽겨쳐진다. (108쪽)

사릉: 단종비 정순왕후
사릉 제향에 참가한 이들은 세 부류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살벌한 분위기에서 가례를 올리고 동거한 기간이 1년도 안된다. 후사가 있을리 만무하다. 단종의 직계 후손은 없다. 제향을 주관하는 전주이씨 문중 사람들, 정순왕후의 친정인 여산송씨 문중 사람들, 그리고 이곳이 선산인 해주정씨 문중 사람들이 모여 매년 정순왕후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린다. (126쪽)
한 많은 여자의 일생, 엉겁결에 권력의 핵심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천추의 한을 남긴 여인 정순왕후는 81세(1521년, 중종 16)로 생을 마감한다. 죽을 당시 신분은 왕후가 아니었다. 국장의 예를 갖춘 능을 조성할 신분이 아니다. 단종의 손위 누이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정씨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고 해주정씨 묘역에 안장됐다. (129쪽)

광릉: 세조와 정희왕후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참도가 없다. 명확한 기록이나 증거는 없으나 유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147쪽)

경릉: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조선 왕릉 중 비의 능이 왕의 능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은 경릉이 유일하다. 석물도 더 풍성하게 차려져 있다. 이유는 이렇다. 지아비 덕종은 1457년(세조3) 19세로 요절했고 당시 신분은 왕세자였다. 지어미 인수대비는 승하 당시 신분이 왕대비였다. 왕릉 자리 원칙은 남존여비가 아니라 군신관계가 우선이다. 종묘사직을 위한 왕릉이기이 군신관계가 절대적이다. (153쪽)

창릉 : 예종
왕릉에 불이 나면 어떻게 될까? 예종의 창릉은 화재의 기록도 갖고 있다. 왕릉은 산세가 좋고 주변에 수목이 울창하다. 부드러운 잔디 이불이 풍성하다. 산불나기 좋은 여건이다. 민가에 불이 나거나 일반 백성의 무덤에 불이 나도 큰일이거늘, 왕릉에 불이 나면 나라의 변고라 하여 왕은 정사를 폐하고 사흘간 소복을 입고 참회한다.

1625년(인조3) 2월 28일 창릉에 불이 나자 인조는 조회를 폐하고 백관과 함께 3일간 소복을 입었다. (<<인조실록>>권8). 이듬해 1월 26일 또 불이 나자 임금과 백관은 다시 소복을 입었다. (<<인조실록>>권11). 1896년(고종33) 4월 23일 능상에 화재가 발생하다(<<고종실록>> 권34). 기이한 기록이다. 화기가 센 것만은 틀림없다. 능에 불이 나면 책임을 물어 능을 지키는 수복(관리)의 목을 베거나 중벌로 다스린다.(158쪽).

선릉 : 성종
성종의 능은 현재 유해가 없는 빈 무덤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무덤을 파헤쳐 도굴했다. 정자각은 불태웠다. 왕의 시신은 행방을 알 길 없다. 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성종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전란 중 몽매한 왜군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 버렸을 것이다. 선조는 새로 관을 짜서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했다. 성종의 무덤 속에는 수의로 넣었던 옷을 태운 재만 관에 들어 있다. 몸을 잃은 넋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174쪽)

연산군묘
조선 제10대 연산군과 폐비인 거창군 부인 신씨, 궁인 조씨,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다. 역사의 증언이 없다면 오붓한 가족묘이다. 연산군의 딸이 능성구씨 집안으로 시집갔는데 사위가 구문경이다. 연산군이 누워 있는 묘역은 능성구씨 선영이다. 연산은 사돈네 선영에 묻혀 있는 셈이다. 왕릉의 능역 규모는 40만~50만 평이 예사인데 여기는 4200여 평으로 조촐하다. (197쪽)

정릉 : 중종
3명의 왕후를 두고도 중종의 능은 단릉이다. 원비 단경왕후 신씨는 온릉(경기도 양주시 장흥명 일영리), 제1계비 장경왕후 신씨는 희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능역),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는 태릉(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부부가 흩어져 네 개의 능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의 능은 모두 42기이다. 약 10%를 중종 부부가 차지했다. 역대와아 중 최다이다. 왕과 정비, 계비가 오손도손 모여 있으면 좋으련만.

아버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인 선릉이 곁에 있다. 합쳐서 선정릉이라 부른다. (205쪽)

강릉 : 명종과 인순왕후
원칙대로 한다면, 태강릉의 명칭은 강태릉이 되어야 한다. 태릉은 왕비 신분인 문정왕후의 능이고, 강릉은 임금인 명종의 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의 여인을 어머니로 둔 탓에 명종은 죽어서도 어머니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33쪽)

조선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어머니 문정왕후릉(태릉)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동쪽 산줄기에 있다. (239쪽)



<오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 신씨 -> 장경왕후 윤씨 (205쪽)

단촐한 석물의 연산군묘(위) -> 단출한 (195쪽)

<목차>

우리 시대에 왕릉이란 무엇인가

프롤로그 1
프롤로그 2

제1대 태조 건원릉
무학대사가 없었다면, 그는 단지 사나운 장수에 불과했을 것
용의 선택, 용의 분노, 용의 눈물

제1대 태조 원비 신의왕후 제릉
굽은 나무처럼 선산만 지키다 간 여인

제1대 태조 비 신덕왕후 정릉
왕조의 시작, 여인의 파란만장도 시작

제2대 정종과 정안왕후 후릉
마음을 비우고 천수를 누리다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
척불의 회오리가 시작되다, 아비를 부정하리라
업장은 짧고 과보는 길다

제4대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
두 얼굴의 영웅, 세종
한글을 쓰는 행복, 가없어라

화합의 축제 종묘대제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 현릉
29년간의 왕세자, 왕 노릇은 2년 3개월

제6대 단종 장릉
청령포에 떠도는 외로운 고혼

제6대 단종 비 정순왕후 사릉
정순왕후여, 이제 한을 푸소서

제7대 세조와 정희왕후 광릉
역사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세조,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다

추존왕 덕종과 소혜왕후 경릉
어ㆍ비의 능이 왕의 능보다 높은 곳에 있네!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창릉
스무 살, 짧은 생애가 남긴 몇 개의 기록

제8대 예종 원비 장순왕후 공릉
압구정동 신화의 그늘, 장순왕후

제9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선릉
성종, 모든 것을 이루었는가, 다 잃었는가

제9대 성종 원비 공혜왕후 순릉
요절한 자매, 함께 누워 있어 그들은 외롭지 않다

제9대 성종 폐비 윤씨 회묘
생애만큼 곡절 많은 회묘

제10대 연산군과 폐비 신씨 연산군묘
조선조 비극의 하이라이트 연산군

제11대 중종 정릉
칼이 없는 권력은 힘이 없다

제11대 중종 원비 단경왕후 온릉
7일간 왕비 자리에 있다가 쫓겨난 비운의 여인

제11대 중종 제1계비 장경왕후 희릉
권력 다툼에 무덤이 옮겨지고, 키워 준 이마저 농락거리로 만들다

제11대 중종 제2계비 문정왕후 태릉
태릉에서 문정왕후와 보우 다시 보기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효릉
하늘이 낳은 대효자의 짧은 치세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강릉
눈물의 제왕, 명종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및 계비 인목왕후 목릉
국난을 맞아 불교의 저력을 발휘하다
국난 극복을 위해 활약한 선조대의 고승들

[부록]
▷조선시대 능·원·묘 일람
▷조선 역대 왕 생존연대 및 재위기간
▷참고문헌


조선왕릉 잠들지 못하는 역사. 1

저자
이우상 지음
출판사
다할미디어 | 2009-06-15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왕릉은 조선왕조 27대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추존 왕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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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아들

저자
강문식, 한명기, 신병주 지음
출판사
책과함께 | 2013-04-20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한 나라 왕이 되기 어렵고, 아들과 친한 아버지 되기는 더 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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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무겁고 비정한권력이 승계되는, 또는 승계되지 못한 다섯 임금과 왕세자의 이야기이다. 두터운 부지간의 믿음속에서 아름답게 계승이 이루어 졌다면 이렇게 책으로 엮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갈등과 오해로 삐뚤이져버린 부자지간의 관계가 왕위 계승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한 책이다.


왕이라는 공식적인 직함 때문에 왕위계승은 국가의 중대한 공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부자간의 사적인 관계도 함께 작용하는 복잡한 사안이다. 당시의 정치적 사건과도 관련되고 개인적 성격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몇 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후손인 우리에게 생각할만한 교훈을 남겨준다.


현대를 사는 소시민들은 부자간에 나누어야 할 권력이 없겠지만, 여전히 갈등은 존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다스리고 추스리기로 나라에서 최고 수준이 요구되었던 왕 조차도 자신의 아들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했음을 보면 우리는 좀 더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가족을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전공한 교수들의 저술이어서 그런지  실록을 비롯한 여러 사료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역사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가 쉽다. 단순히 그렇더라하는 얕은 역사서의 기술보다는 깊이 있는 내용이 만족스럽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_문제적 아버지와 문제적 아들들

1장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_태조와 태종
이방원,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준 아들
아버지를 왕으로 세운 킹메이커
부자간 갈등의 서막, 정몽주 살해 사건
권력에서 소외된 7년의 설움
갈등의 폭발, 제1차 왕자의 난
태조의 반격, 조사의의 난
모두 하늘이 시키는 것

2장 서로에게 등을 돌린 아버지와 아들_태종과 양녕대군
세자의 조건, 적장자와 능력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 양녕
‘세자에게 활쏘기를 가르쳐라’ vs. ‘활쏘기는 학업에 방해가 됩니다’
반성의 기회를 주는 아버지 태종
형세가 장차 가르치기 어렵게 되다

3장 아비로부터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_선조와 광해군
전쟁이 가져다준 ‘행운’
분조를 이끌어 아버지에게 인정받다
부자간 균열이 시작되다
아들에게 드리운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

4장 상처 입은 아버지와 새 세상을 본 아들_인조와 소현세자
왕이 된 아버지, 왕세자가 된 아들
분조를 이끌며 정치를 배우다
무릎 꿇은 아버지, 인질이 된 아들
서울의 아비와 심양의 아들
입조론에 틀어지는 부자 관계
새 세상을 목격한 아들을 버린 아버지

5장 조선 왕실 최대 비극_영조와 사도세자
마흔둘에 다시 얻은 귀한 아들
1749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명하다
계속되는 부자의 갈등
부왕에 대한 공포심과 사도세자의 병
세자의 비밀 관서행과 영조의 분노
왕실 최대의 비극, 1762년 임오화변

글을 마치며_권력은 어떻게 계속되는가―조선의 왕과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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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 조선왕을 만나다

저자
최일생 지음
출판사
메디안북 | 2013-08-25 출간
카테고리
기술/공학
책소개
저자는 역사학자, 또는 작가나 평론가도 아니다. 그러나 의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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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27대 왕의 사인(死因)을 현재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신선한 시도이다.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하고 승하한 경우 또는  정치적 상황이 연결된 경우에는 독살이라는 의심이 항상 배후에 있는 듯 생각되었고 그 의심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기도 한다. 이야기꺼리로서의 독살설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하지만 역사를 이해할 때는 진실을 가리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기때문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경종의 독살설과 정조의 독살설, 그리고 고종까지 이해되지 않은 죽음에서 과연 현재의 의사는 어떤 사망원인을 내릴까가 궁금했다. 저자는 고종만이 독살 의혹이 있는 것으로  결론내렸다.


경종은 생감과 게장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장티 푸스에 의한 장 파열로 승하한 것으로, 정조는 정순왕후의 독살이 아니라 결핵성 뇌막염으로 그 원인을 지목했다.


열병 때 게장이나 생감등 상극인 음식물을 먹지어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경종의 경우 장티푸스 회복기에 음식 조심을 잘못해 평소보다 많은 양의 식사를 해 염증이 심한 소장이 파열되어 생긴 복막염으로사망한 전형적인사례였던 것이다. (231쪽)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일반인으로서 그 인과관계가 모두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내용은 아래와 같이 정리해 둔다.


조선왕조 실록에는 세조가 앓았던 병의 증세나 질환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단지 언제 임금이 편찮하였다는 기록만 있고,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세조의 피부병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이 없다.(81쪽)


하여간 세조는 즉위 4년부터 단종. 형제들, 친척과 대신들을 유배 보내거나 살해해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로 인해 불면증, 가끔은 악몽 (nightmare)에 시달렸고 이는 심신 탈진으로 이어져 더 이상은 생명을지탱하지 못할 정도로 육체도 쇠약해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83쪽)


야사에서 흔히 언급하는 세조의 피부병은 호기심거리로만 충분한 것인가보다. 세조의 사인은 불안 신경증이라고 추정된단다.



책을 읽어가면서 아쉬웠던 점은 역사와 관련된 내용임에도 시간적 고증을 정확히 하지 않은 점이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후비 정성왕후 서씨 : 한평생 무자식으로 지내다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쓰러져식음을 전폐하다가 66세 니 이로 운명하였다.(238쪽)

⇒ 정성왕후의 사망년도는 1757년, 사도세자의 사망년도는 1762년인데 정성왕후가 사도세자의 뒤주사건을 들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나마 이들 부자 사이에서 대비 인원왕후 김씨와 정성왕후 서씨가 완충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데 영조 33년 (1752년) 2월에 왕비가, 3월에는 대비가 세상을 떠났다.(251쪽)
⇒240쪽에는 정성왕후가 1757년에 돌아가셨는데 여기는 또 왜 1752년이야?


250쪽
영조 11년 (1735년)
영조 24년 (1748년)
영조 21년 (1751년)
251쪽
영조 29년 (1753년)
영조 33년 (1752년)
영조 33년 (1735년)
⇒재위년도와 서기년도가 뒤죽박죽이다. 두 페이지 안에서 오류의 최고 정점을 찍고 있다.



오타도 너무 많다.여러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많은 것은 처음인 듯하다. 출판사의 교정 능력이 너무 안타깝다.


< 오탈자>
P78 자신의 뜻데로 → 뜻대로
P119 연산군의 일연의 행위원인을 → 일련의
탐익했다 → 탐닉했다
이붓 어머니→의붓 어머니 (이붓은 의붓에 대한 북한 말이라고 함)
P155 문종왕후 윤씨에게서는 →문정왕후 윤씨
P220 심한 근시 환자에서 많이 발생기도 한다 → 환자에게서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P236 경종은 마음이 어려 → 여려
p269 여덟 살에 왕위에 오른 헌정은→ 헌종은

 

 

 

<목차>

머리말 iii
제1대 태조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운 임금 3

제2대 정종
과도정권을 이끈 허수아비 임금 21

제3대 태종
조선시대 왕권을 확립한 임금 31

제4대 세종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임금 43

제5대 문종
세자로서 좋은 업적을 남긴 임금 55

제6대 단종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임금 65

제7대 세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임금 75

제8대 예종
족질로 고생했던 임금 87

제9대 성종
도학정치를 펼친 임금 97

제10대 연산군
흥청망청 제멋대로 살다간 임금 113

제11대 중종
얼떨결에 왕에 오른 임금 127

제12대 인종
효심이 깊었던 임금 139

제13대 명종
마마보이로 왕위를 지킨 임금?147

제14대 선조
변덕이 죽 끓듯 하던 임금 155
제15대 광해군
미신을 몹시 신봉했던 임금 169

제16대 인조
피해의식 속에서 왕위를 지킨 임금 181

제17대 효종
북벌계획을 세웠던 임금 195

제18대 현종
후궁을 두지 못했던 유일한 임금 203

제19대 숙종
자기애적성격(narcissist)을 가진 임금 213

제20대 경종
자녀를 가질 수 없었던 임금 225

제21대 영조
탕평책으로 정국을 안정시킨 임금 235

제22대정조
조부를 잘 공경했던 임금 249

제23대 순조
콜레라 창궐로 수난을 겪은 임금 261

제24대 헌종
조선왕 중 제일 잘 생긴 임금 269

제25대철종
강화 땔나뭇꾼 출신 임금 277

제26대 고종
수난시대의 희생양이 된 임금 287

제27대 순종
조선 마지막 비운의 임금 299

조선왕들은 왜 단명했을까? 305
조선시대 주요 연대표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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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백성실록

저자
정명섭 지음
출판사
북로드 | 2013-08-07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조선 왕조가 남긴 백성들의 은밀하고 위대한 이야기- 거꾸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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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임금의 국정운영과 관련된 사건 중심으로, 그리고 조선의 최고위층과 관련된 인물들 위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라의 운영이라는 것이 결국은 백성과 연관되어 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반 백성의 삶이 단편적이나마 남아 있게 마련이고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모습들을 곳곳에서 읽어내어 알려준다.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책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문 연구자에 의해 저술된 책으로 그 내용의 출처는 어느 한 곳이 아닐 것이다.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 백성들의 삶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내고 정리한 저자의 노력이 대단하다. 실록을 뒤져가며 수고하며 읽지 않는 이상 무슨 내용들이 실려 있는지 알 수 없을텐데 여러가지 내용을 소개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책이다.


책의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를 해 놓았다. 일상생활, 범죄와 관련된 것, 잡다한 이런 저런 내용, 남녀관련, 외국인관련...나름대로 읽은 내용을 분류해 보면 이렇다. 어느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내용이기보다는 작은 주제마다 두세장 정도의 짧은 소개 형식의 글이 이어진다.


하지만 너무 다양한 내용을 전달하다보니 책을 다 읽고 나서 딱히 기억에 남거나 감동적인 부분이 남지 않는 것이 개인적으로 조금 아쉽다. 책을 구성하고 저술한 노력에 비해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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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탈자>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백성들의 삶이 단조롭고 평화로웠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고, 괘도에서 이탈한 삶을 살았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107쪽)"
괘도? 궤도!


"하지만 조선의 두 번째 임금인 정조의 맏아들인 이원생은 대담하게도 할아버지이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도장을 위조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166쪽)"
정조? 정종!

 

 

<목차>

1부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백성들의 고단한 일상생활
1. 5월 5일은 돌 던지는 날 2. 왜구 킬러 3. 무기를 팝니다 4. 최고령 군인 5. 아이의 복수 6. 쌀 대신 흙을 먹다 7. 조선의 통일벼 ‘오십일 벼’ 8. 영의정의 고리사채 9. 스님의 역습 10. 굶주림을 면하는 방법 11. 조선의 사고사 1위 12. 몸으로 대신 때워줍니다 13. 원각사의 기적 14. 조선시대의 여론조사와 시위 15. 인육을 먹다 16. 찜질방의 조상 17. 조선판 종말론 18. 그 남자가 부자가 된 방법 19. 고아원을 세우다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2부 살인은 가볍고 불경은 무겁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범죄와 형벌
1. 조선판 ‘도가니’ 2. 자네 머리는 부추 같네, 그려 3. 누가 이석산을 죽였나? 4. 여인이 한밤중에 운 이유는? 5. 조선의 사이코패스 6. 살인은 가볍고 불경은 무겁습니다 7. 발을 자를까? 8. 조선판 솔로몬의 재판 9. 3대 도적의 선배, 장영기 10. 아이의 발이 잘린 까닭은? 11. 수적 소탕령 12. 재판에서 이기는 법 13. 이마에 새긴 글씨 14. 그 여자가 죽은 이유 15. 시체 외에는 검시하지 말 것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3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순응하거나 반항하거나
1. 동전 던지기 역사상 최고의 판돈│2. 지폐를 유통시켜라 3. 조선의 해방구 4. 북방 개척 5. 강제이주를 피하기 위한 선택-실패 사례 6. 강제이주를 피하기 위한 선택-성공 사례 7. 매에 울고 매에 웃다-1 8. 매에 울고 매에 웃다-2 9. 임금님, 나이스 샷! 10. 사형수 특공대 11. 골칫덩어리 선물 12. 물소를 수입하다 13. 조선도 장성을 쌓았다 14. 운하를 꿈꾸다 15. 다시 살아나는 운하의 꿈 16. 온천을 찾습니다 17. 비를 내리는 방법 18. 조선의 멸화군 19. 땅을 사랑한 임금 20. 울릉도 숨바꼭질 21. 환상의 섬, 요도와 삼봉도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4부 차라리 어우동처럼 죽더라도 이렇게는 못살겠다
―남녀칠세부동석이 전부가 아니다
1. 조선 최초의 팜므파탈 2. 역사인가 막장드라마인가 3. 세계 최초의 여성전용도로 4. 두 여인 이야기 5. 조선시대의 이혼 6. 조선판 주홍글씨 ‘자녀안’ 7. 차라리 어우동처럼 죽더라도 이렇게는 못살겠다 8. 가히 부끄러울 뿐이다 9. 관광 금지 10. 재혼 금지령 11. 부인, 성질을 부리다 12. 그녀가 매를 맞은 이유 13. 자유를 향한 탈출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5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귀천이 없다
―조선을 찾아온 낯선 사람들
1. 버려진 기억, 만산군 2. 백성 찾아 삼만 리 3. 가족을 찾아 조선에 오다 4. 맹활약한 귀화인 5. 경복궁에서 《코란》을 낭독하다 6. 수유적을 폐지하다 7. 전라도까지 내려간 오랑캐, 광화문에 들어온 중국인 8. 조선판 백분토론 9. 백제국의 후손 구변국 10. 이만주를 찾아라 11. 영어마을에서는 영어만 쓰고, 사역원에서는 중국어만 쓸 것 12. 조선의 슬픈 자화상, 공녀 13. 양성의 표류기
조선시대에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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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개정판)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출판사
청년사 | 2005-05-11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개정판 출간 의의[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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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삶을 보여주는 시리즈의 두번째 책.

 

 

어린 왕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나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기보다는, 김상헌의 후예로서 17세기 중반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정치의 핵심을 이루던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외척이 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
역사를 국왕의 나이와 같은 우연한 요소, 개별적인 사실에 매달려 설명하는 것은 그 시기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왕권의 약화와 외척의 권력 집중으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세도정치는 결코 국왕의 나이가 어렸던 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반적인 사회 변화를 근저에 두고 변모되어 온 조선의 지배 체제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상태였다." (25쪽)



황실 호칭의 이모저모


사도 세자는 왜 뒤주에 갖혀 죽었을까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에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그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 준 것이었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가 그토록 살려 달라고 애원했음에도 물도 주지 못하게 했고, 자신이 사랑하고 보호했던 세손(정조)이 울면서 애원하는 것도 외면했던 행동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조처였다.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앞뒤가 다른 이러한 행동은 왕권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영조의 의지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영조는 그 아들 정조와 부인 혜빈 홍씨를 각별하게 보호하였다 이 또한 영조의 변덕스러운 심리의 발로라기보다는 다음 왕위를 이을 세손을 보호함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지키려는 의도였다. 그러한 보호 덕분에 정조는 순탄하게 즉위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탕평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47쪽)



흥선대원군은 왕처럼 행세하였는가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이 어째서 그렇게 쉽게 외척 가문의 권위를 대체할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과감한 '개혁' 때문이었다.
......
그는 우선 세도정치 아래에서 각종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과감히 숙청하고 이들이 부정으로 축적한 재산을 철저히 조사해서 국고에 환속시켰다. 한편 세금을 되도록 합리적이고 공평하게 부과하려 했다. 지난 수십 년간 머뭇거리기만 하고 시행하지 못했던 정책들을 흥선대원군은 과감하게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세도정치기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 밖의 문제점들은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58~59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닭
"이처럼 4월 18일 평양을 떠났던 정벌군은 5월 22일 아침에 위화도에서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어째서 정벌군이 평양을 떠나 위화도에 주둔하기까지 20일 가까이 걸렸는가 하는 점이다. 당시 음력 4월부터 비가 많이 왔었는지, 실제로 건너기 어려울 정도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났었는지 등등 의심한다면 끝이 없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실이 위화도에서 회군할 무렵 "큰 비가 며칠 내렸지만 물은 불지 않았다. 회군하여 겨우 물가에 닿았을 때 큰 물이 몰려와 온 섬이 물에 잠겼다.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라는 기록이다. 즉 큰 비는 회군하기 직전 며칠 동안 내렸던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일부러 행군 속도를 늦추고 또 장기간 위화도에 머무르며 큰 비를 기다렸다고 짐작된다. "이 때 민간에서 목자(곧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번에 군 중에서도 모두 불렀다."라는 기록도 있어서, 군사들이 이성계가 왕이 되려 한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63~65쪽)



임진왜란은 과연 이긴 전쟁인가
"전쟁은 결코 승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전쟁의 성격과 규모도 정확히 예견하지 못했고, 또 늦게나마 위기를 인식한 뒤에도 충분한 군사적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 결과 전 국토가 유린되고 온 백성이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죽고 갈라진 그 형상을 보고서 차마 전쟁을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전쟁에 대한 책임은 일본만이 아니라, 전쟁을 사전에 막지 못한 조선왕조의 국왕을 비롯한 집권층에게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82쪽)



사간원 헌납 김조선의 하루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일생
"이항복처럼 영의정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전체 문과 급제자 중 1퍼센트도 안되었다. 청요직에 오를 수 있는 사람도 문과 급제자 중 25퍼센트에 불과했다. 사실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수재들과의 경쟁을 뚫고, 문과에 급제한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은 끝내 문과에 합격하지 못하고 평생 '길 떠나는 나그네'로서 과거에 응시하기만 하다 삶을 마감하였다." (107쪽)



백성들이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는가
"그러나 아무 때나 신문고를 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먼저 담당 관원에게 호소하여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게 했다. 지방에서는 먼저 자기 고을의 수령에게, 그 다음 관찰사에게,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사헌부에 호소하도록 했다. 사헌부의 처리에도 만족하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신문고를 치도록 하였다. 이때 각 단계별로 전 단계의 관원에게서 그 사안을 처리했다는 확인서를 받아 제출해야만 다음 단계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정당한 사유가 있더라도 신문고를 칠 수 없게 했고 오히려 엄한 벌을 내렸다. 정치의 득실이나 민생의 안정과 관련되어 건의할 것이 있는 사람도 먼저 의정부에 올렸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신문고를 칠 수 있게 했다. 다만 역모와 관련된 사안의 경우에는 바로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115~116쪽)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지자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은 상언과 격쟁만이 남게 되었다. 상언은 대부분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그 앞에 나아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왕이 있는 곳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왕의 이목을 끈 다음 구두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으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조선의 독특한 제도였다. 상언은 신문고에 비해 절차가 간편하여 일반 백성들이 이용하기 쉬운 것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알아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격쟁도 별다른 제약은 없었지만 격쟁을 한 사람은 먼저 형조의 취조부터 감수하여야 했다. 상언이나 격쟁도 처음에는 신문고와 마찬가지로 호소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제한되었고, 다른 사람이 대신하는 것돋 금지되어 있었다." (118쪽)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었을까
"이렇게 <경국대전>의 규정은 관제와 같은 통치 체제의 골격에서부터 교육,과거 제도의 세부 규정, 토지,가옥,노비 등 재산권의 보호 및 분쟁 해결 절차, 그리고 관리의 예절은 물론 서민을 대상으로 한 풍속상의 권장 사항까지 그 내용이 아주 다양하였다."


"요컨데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 체제와 국정의 기틀을 세우는 헌법의 성격은 물론, 행정 절차를 규정한 행정법이며, 형사와 민사에 관한 기본 법전인 동시에 관혼상제 등 풍속에 관한 사회규범까지를 담고 있는 매우 포괄적인 법전이었다." (130쪽)



17세기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들
"그러나 조선시대 전 시기 동안 양국 과나계가 문자 그대로 자존심을 내팽개친 무조건저인 사대 관계는 아니었다. '사대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 상황과 국제적인 역관계를 조선 나름대로 고려하여 탄력적으로 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조선 초기에 특히 그러하다. 요동 정벌에 나섰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을 들어 그를 사대주의자로, 조선 건국을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마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명을 대국으로 인정하면서 그들의 책봉을 받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형식일 뿐 자존심까지 내팽개치고 섬긴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 관계는 국가 안보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앞선 문물을 수용하려는 현실적인 생존의 방도였다." (131~132쪽)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그는 <대동여지도> 속에 써넣은 설명문에서 이 지도가 뒷날 국방상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전통 사회에서도 지도가 가장 요긴하게 활용될 수 있는 곳은 국방 분야였으므로 이 점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데에 있다. 중인들은 오래 전부터 지도 제작 실무를 맡아 오고 있었지만, 이처럼 독자적으로 지도를 기획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언급하는 것은 김정도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양상이었다. 이는 중인들의 의식이 전보다 성장해 나가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146~147쪽) 


"이미 조선 후기 관찬 지도 제작의 역사 속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들 만한 기술적 여건은 대부분 충족되어 있었다. 따라서 김정호는 축적되어 온 지도 제작 기술과 정보를 충분히 활용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50쪽)


오랑캐, 왜구보다 더 무서웠던 역병
"조선 후기 사회에서 역병이 크게 돌게 된 까닭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국제적 측면에서 이 시기 국제 교역의 확대를 들 수 있다. 질병사 연구에 다르면, 18, 19세기 전염병은 거의 전 세계에서 발생했다고 하는데, 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인 조선 역시 이 세계 역병 유행 지도의 한 부분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두창이나 콜레라 등은 모두 중국에서 들어왔다. 둘째로 사회변동도 역병이 크게 도는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농촌 사회의 분해와 도시의 성장에 따른 인구의 밀집은 전염병이 유행하기에 좋은 조건을 조성하였다. 지역 사이의 교류와 인구의 밀집으로 인해 악화된 환경은 전염병 병균의 훌륭한 서식지 노릇을 했다. 셋째로 문화,관습적 측면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으며, 채소를 잘 씻지 않고 그냥 먹기를 즐겼고, 우물 가까운 곳에 뒷간이 위치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장례식 때에는 일가가 모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이 같은 장례 풍습은 매우 강고해서, 지역 단위로 역병이 유행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 놀이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말에 원나라로부터 도입된 타구는 조선왕조에 들어와 방희 또는 격방으로 불리면서 15세기에 크게 성행하였다. 타구는 놀이 기구도 간단하고 장소에 구애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또 생활 주변의 빈 공간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놀 수 있기 때문에 왕실이나 귀족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이 즐길 수 있는 놀이였다." (175쪽)



조선시대 화원들의 이력서
"화원들은 개별 작품도 그렸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국가의 공식 행사에 동원되어 그림을 그리는 일에 보냈다. 화원들은 국가의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설치하는 도감이라는 기구에 소속되었다. 화원들은 작업이 시작된 날부터 각 숙소에 배속되어 작업을 했다. 이들은 작업이 끝날 때까지 도감 밖으로 나갈 수 없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에는 처벌을 받았다. 이들은 작업의 대가로 월급에 해당하는 쌀과 포목을 매달 그믐에 지급받았다. 조선 후기에 이들의 급료는 대개 쌀 6~9두, 포목 한 필 정도였다. 또한 작업 성적에 따라 일부 화원에게는 포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185쪽)



판소리는 과연 민중 예술이었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패션 감각
"조선시대 사람들은 염색법을 몰랐던 것도 흰옷만 입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시대 사용되던 염료는 주로 식물성이었고, 대표적인 것으로는 쪽이 있다. 쪽을 이용해서 옷감을 푸른색으로 물들였는데 물들이는 횟수와 농도를 조정하여 연푸른색부터 짙푸른 색까지 다양한 색깔의 옷감을 만들어 냈다. 이 밖에도 치자나 유색 식물들을 이용하여 옷감을 염색했다." (211쪽)



보우는 요승인가, 성인인가
"명종 때의 불교 부흥은 불교계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 문정왕후가 발의해서 시작하였고,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중단되었다. 불교 부흥을 둘러싼 공방은 문정왕후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반면 불교계가 유학자들의 불교 탄압에 맞서서 불교 부흥의 정당성을 역설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26쪽)


"한편 보우가 조선 불교를 기사회생시킨 사실을 높이 평가하여, 당시 불교도들이 이미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였다. 과연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불교를 재건한 인물인가? 불교의 진정하나 재건이 되려면, 고려 말 불교계의 폐단에 대한 엄격한 반성과 더불어 조선시대 불교로서의 개혁저인 전망이 있어야 했다. 유감스럽게도 보우의ㅣ저술에서 그러한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보우가 선교 조화와 유불 일치의 입장에 서기는 하였으나, 이를 체계적인 사상으로 발전시키지는 못하였다." (227~228쪽)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주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조선 지식인들 역시 17세기경부터 중국을 통해 서양의 과학과 접촉하면서 우주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서양의 우주론을 처음 접한 조선 지식인들의 충격은 상당하였다. 특히 지구가 원형으로 생겼다는 지구설은 커다른 파장을 던졌다. 지구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면 지구상에 중심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교한 서양의 세계지도에도 중국은 좀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도저히 중심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 중화주의에 침잠해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중화라는 실체의 상당 부분은 허구였음을 뜻하며, 그렇다면 조선 중화 역시 허구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238~239쪽)



조선 군대는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웠을까


격조 있는 읽기, 쓰기, 보기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한동안 사찰은 여전히 유력한 출판 기관이었고, 그 출판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가장 역량 있는 인재들을 확보한 보고였다.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출판 기술도 조선시대의 출판 사업에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255쪽)


"건국 초기의 지방 출판이 사찰의 축적된 출판 능력을 기초로 이루어진 데 반해, 이 시기에 이르면 1세기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새롭게 조선 사회의 지도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사림들에 의해 출판 사업이 주도되었으며, 그 무대가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의 확산은 항시적인 사림의 출판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요즘 말로하면 각 학교마다 출판부가 있어 책을 출판하는 형세와 같은 셈이었다." (257~258쪽)



조선은 주자학 때문에 망했을까
"주자학과 성리학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우리가 흔히 주자학이라 부르는 것은 엄격히 말하여 성리학의 일부에 불과하다. 성리학은 원래 '성명의리의 학'이 준말이다. 성리학은 중국 송 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새로운 유학 사상 체계로 성립되었다. 당말 송초를 거치며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사대부들은 이전의 유학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우주론, 존재론, 인성론 등의 치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면서 유학을 재해석하였다." (267쪽)


"주자학 자체는 중세적 사상이었다. 중세 사회가 마감되고 근대사회로 옮겨 가던 시점에서 주자학은 이미 그 임무를 마침과 함께 생명력도 다하였던 것이다 주자학이 역사 발전에 장애로 작용하였다고 해도 그 책임을 주자학 자체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책임의 대부분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여 새로운 단계에 맞는 사상을 개발하고 수용하려 노력하기보다는 주자학을 고수하면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사용한 사람들에게 지워져야 할 것이다." (277쪽)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런데 아직도 첫머리에서 제시한 아리랑은 소개하지 않았다. 이 노래는 실은 1920년대에나 나오게 된다. 곡조에서나 가사에서 기존의 아리랑들과 다른 '신아리랑'인 것이다. 1926년 나운규가 연출, 주연을 한 영화 <아리랑>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단성사로 몰려갔으며 이후 2년 6개월간이나 전국을 순회 상영하면서 일제하 조선인의 심금을 울렸다. 사람들은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서 모두 눈물을 흘리며 영화의 주제곡인 <아리랑>을 같이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장 흔히 듣는 아리랑이다. 주로 <경기아리랑>(일명 <서울아리랑>,<본조아리랑>)을 모태로 신민요조의 곡조를 차용하여 만든 노래로서, 가사 역시 나운규의 창작이 가미되었다. 고종 임금이 즐긴 아리랑은 나운규 <아리랑>의 모태가 된 <경기아리랑>이었을 것이다." (289~290쪽)

 

<목차>

어린 왕은 왕 노릇을 할 수 없었나 - 오수창
왕실 호칭의 이모저모 - 김세봉
사도세자는 왜 뒤주에 갇혀 죽었을까 - 김형자
흥선대원군은 왕처럼 행세하였는가 - 연갑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까닭 - 오종록
임진왜란은 과연 이긴 전쟁인가 - 정홍준
사간원 헌납(獻納) 김조선(金朝鮮)의 하루 - 최이돈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의 일생 - 차미희
백성들이 정말 신문고를 두드릴 수 있었는가 - 구덕회
《경국대전》은 조선의 헌법이었을까 - 남지대
17세기 서울에 왔던 중국 사신들 - 한명기
〈대동여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배우성
오랑캐, 왜구보다 더 무서웠던 역병 - 신동원
아이들도 왕도 신나는 장치기 놀이 - 심승구
조선시대 화원들의 이력서 - 신병주
판소리는 과연 민중예술이었나 - 정재훈
조선시대 사람들의 패션 감각 - 김정미
보우는 요승인가, 성인인가 - 남동신
조선시대 사람들은 우주와 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 노대환
조선 군대는 어떤 무기로 어떻게 싸웠을까 - 노영구
격조 있는 읽기, 쓰기, 보기 - 오향녕
조선은 주자학 때문에 망했을까 - 송양섭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이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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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개정판)

저자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출판사
청년사 | 2005-04-29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개정판 출간 의의[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2]의 ...
가격비교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작은 소제목별로 주제에 해당하는 내용을 발췌하여 적어 놓는다. 독자인 내가 생각하는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

 

 

조선 인구가 1천만명을 넘어선 시기는
"조선시대의 인구가 1천만 명을 돌파한 시기는 대체로 1500년 전후의 시기, 즉 16세기 전후임도 알 수 있다." (19쪽)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의 여성들은 매일매일 이혼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이혼이 거의 허락되지 않았다. 국가가 최대한 이혼을 억제하였던 것이다. 이는 정절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죽은 뒤까지 정절을 지키자니 재혼이 금지될 수밖에 없었고, 재혼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 이혼녀가 양사나된다는 것은 곧 사회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이이ㅔ 처를 버리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금지되었고, 따라서 칠거 사안 중 음란과 시부모에 대한 불효 외에는 거의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다." (33쪽)


"그런데 이혼이 어렵다거나, 그래서 소박이라는 방식을 사용했다거나 하는 것은 주로 양반층이었고, 서민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이혼이 쉬웠다. 사정파의 또는 할급휴서라는 방법이 있었다. 사정파의란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때 부부가 맞주 앉아 부부 생활을 계속할 수 없는 사정을 말하고 결별의 말을 하여 서로 응낙한 뒤에 이혼하는 것이다. 할급휴서는 이혼 문건 같은 것으로서 칼로 웃옷의 자락을 베어 그 조각을 상대방에게 주어 이혼의 표지로 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서민의 경우로 사대부가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35쪽)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족보를 그대로 다 믿을 수 없다. 족보를 믿을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그것은 족보의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과는 무관하게 꾸며진 것일 수도 있지만, 족보의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족보상의 시조와 나는 혈연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있다는 것이다." (39쪽)



향약은 지방자치의 원형이었을까


서당에서 향교, 서원까지
"양반 자제들읭 고급 관료로의 본격적인 진출은 초등교육 단계인 서당 공부를 거쳐 향교 서원 단계이 중등교육을 마치고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들어간 다음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61쪽)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두레는 생산 주체인 피지배 농민들이 구성한 노동조직이라는 점, 대상의 범위가 전통적인 생활문화 공간이었던 마을을 단위로 하고 잇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이에 따라 두레는 단순한 노동조직이라기보다 마을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과 관련되면서 기능하고 있었다. 이 점은 두레 조직이 그 자체의 성격상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문화 변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음을 뜻한다." (71쪽)



신분 사회의 피해자, 백정
"고려시대에는 16~60세의 저어남이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일반 요역 외에 군인,향리,역정 등처럼 특수한 신분 계층의 사라마들이 지는 세습적인 신역 내지는 직역이 별도로 존재했다. 신역,직역의 부담자를 정호라고 한 것에 대하여, 정호를 제외한 일반 농미니은 백정이라고 불렀다. 정호에게는 원칙적으로 일바나 요역에서 면제해 주고 일정한 면적의 토지를 역으로 지는 대가로 지급해 주었으나, 백정에 대해서는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백성이라 촌민 등의 이름으로 불렀고, 그 대시니 백정이라는 이름은 주로 도축업,고리제조업에 종사하던 계층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87쪽)


"이처럼 양수척, 화척의 유래는 매우 오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가운데 일부는 고려시대에 여러 차례에 걸쳐 대내외적 혼란기를 틈타 한반도에 들어온 북방 유목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백정층 모두가 이들만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 초기에는 거골장이라고 불리던 전래의 도축업자들이 전 지역에 걸쳐 상당히 많았다. 이들의 명칭은 16세기 이후에는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보아 이들은 도축이라는 업종의 유사성으로 인해 백정층으로 자연히 흡수된 듯하다. 이 밖에도 토지로부터 이탈된 많은 유랑민들이 경제저거인 이유 등으로 백정층에 유입되기도 하였다." (89쪽) 



임꺽정의 분노와 좌절
"임꺽정은 관군과의 3년에 걸치는 전투 끝에 생포되어 1562년 초에 최후를 마쳤다. 임꺽정 부대의 활동은 봉건국가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도사 수령,부장 등을 서슴없이 처단하였으며, 재상, 관료, 양바나 등 봉건 지배층을 적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봉건 정부는 이들을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도적의 무리인 군도가 아니라 국가 기틀을 뒤흔드는 반적으로 여겨, 많은 반대와 희생을 무릅쓰고 군사를 동원하여 토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7쪽)


"임꺽정의 반란은 훈구와 사림 세력의 교체를 촉진하였다. 기존의 지배 세력을 역사의 무대에서 글어내리고, 새로운 사회 세력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임꺽정 자신의 문제인 천민층의 신분 해방은 해결하지 못했다. 그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는지도 사실은 의문이다. 그는 원초적으로 봉건 지배층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항심을 지녔지만,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생산 대중의 힘을 결집하여 해결하려는 사회의식은 지니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의 저항은 생산 활동에서 유리된 채, 잉여물을 약탈하는 도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108쪽)



조선시대 형벌 제도는 어떠하였나
"그런데 모든 관청에서 죄인을 자의로 처결한 것은 아니었다. 사형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오직 국왕만이 가지고 있었고, 관청별로 죄인을 처벌할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지방 군현에서 범죄가 발생하면 태형에 처할 만한 가벼운 범죄의 경우만 수령이 직접 처결할 수 있었으며, 장형 이상의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영에 있는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경우에는 관찰사가 국왕에 보고하였고, 국왕만이 최종 사형권을 행사하였다. 사형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정에서 세 차례릐 심리 과정을 거친 후 연말에 사형을 집행하였다. 백성들이 억울한 옥살이라를 하는 일이 없도록 정부에서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11쪽)



돈 한 냥, 쌀 한 말, 베 한 필의 가치
"18세기 쌀 한 섬의 평균 시세를 닷 냥으로 본다면, 한 냥의 구매력은 오늘날의 화폐단위로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의 한 섬은 지금 한 섬의 60퍼센트 내외이고, 지금 현미 한 섬은 155킬로그램이다. 2004년 8월 현재 보통 품질의 쌀 20킬로그램의 소매가격은 55,000원 정도이다. 그렇다면 18세기 한 섬은 지금 시세로 25만원 남짓하고, 한 냥의 구매력은 지금 화폐로 5만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132쪽)



농사는 어떻게 지었나
"벼 재배 과정은 이른 봄철 논을 갈고 고르는 작업, 봄철의 씨앗 뿌리기와 씨앗 덮기, 여름철의 김매기와 비료 주기, 가을철의 벼 베기, 늦가을 초겨울의 논갈이 작업으로 이루어졌다. 벼 재배 방법에는 물을 채운 논에 미리 발아시킨 볍씨를 파종하는 직파법, 비료 성분을 묻힌 볍씨를 물이 없는 논에 파종하는 건경법, 못자리에서 모를 일정 정도 키운 다음 전체 논으로 옮겨 심는 이앙법 등이 있었다." (136쪽)



서울의 장사꾼들
"이 시전에 속한 상인들은 세칭 우대사람라고 불렀다. 이들은 직업을 대대로 물려받았으며, 각각 방이라고 하는 개별 전포에서 장사를 했다. 즉 입전에 속한 상인들은 입전 일방, 입전 이방 등으로 부르는 점포에서 각각 장사를 했다. 우리가 상점을 보통 전방이라고 하는데, 바로 시전의 전과 점포의 방을 합쳐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한편 애초에 시전은 정식 건물을 지어 입주하였으나, 시전 상인의 수가 늘면서 정식 상가 옆에 임시 건물을 지어 장사를 하는 상인들도 생겨났다. 이러한 임시 점포를 가게라고 한다. .오늘날 가게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 (146쪽)



장돌뱅이의 애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따르면 모시 산지로  유명하였던 충청도 홍산, 임천, 한산, 비인, 남포의 장사는 2,7일, 5,10일, 1,6일, 3,8일, 4,9일에 열리고 있었다. 각 고을만 보면 여전히 5일 간격의 정기시만 열렸지만 이들 지역 전체롤 보면 매일 장시가 열렸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농민은 바쁜 농사철에도 짧은 거리만 가면 장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이익을 본 사람은 장시를 돌아다니던 행상이었다. 이들은 하루 왕복 거리를 두고 날짜를 달리하여 열리는 장시들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생계를 이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는 인접 장시 사이에 열리는 날자가 조정됨으로써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146쪽)



역관들이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는데
"역관 선출은 역관의 과거인 역과를 통해 이루어졌다.
......
조선 후기에는 정기 시험 외의 과거가 자주 시행되었고, 이에 따라 역관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숙종 대에는 총 600여 명의 역관이 사역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역관들 중 실제로 필요한 인원은 50~60명에 불과하였다.


정보는 일일이 이들에게 직책을 마련해 줄 수 없었으며 이들 모드에게 보수를 지급할 만한 재정적인 능력도 없었다.
......
이에 따라 정부는 임시 방편책으로 역관에게 체아직을 제수하게 되었다. 즉 관원 몇 명이 한 명 몫의 녹봉을 나누어 받고 돌아가며 근무하는 체아직 제도를 역관에게 적용함으로써 실수요 인원보다 10여배에 달하는 역과 합격자를 수용하여 역관의 이탈을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체아직은 보수가 충분치 않아 역관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하였다.
......
이는 역관들로 하여금 사신을 수행하여 외국에 가는 것을 무역의 기회로 포착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
역관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체아직 제도를  실시한 조선 정부는 이제 역관들에게 일정한 액수의 무역 자금을 가지고 갈 수 있게하여, 공식적으로 이 범위 내에서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이것은 체아직에 대한 일종의 보수였던 셈이다." (174쪽) 



광산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조선 초기에는 금,은 광산에 대해 정부에서 억제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농민들도 힘든 작업에 대한 동원만 되고 자기 이익을 취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광산 개바라을 반대하였다.
......
결국 성종 대 <경국대전>에서는 금의 채굴을 금지하고 다만 그 광산을 잘 보호하도록 법제화하였다.
......
16세기에는 중국과 무역이 확대되어 비단 수입이 늘어나고 그 값으로 지불하기 위한 은이 많이 필요해졌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은광을 채굴하는 것 외에 민간인의 불법적이니 채굴도 이루어졌다.
......
17세기에는 정부에서ㅓ 경영하는 수공업이 해체되었으며 그것은 광산 경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17세기 중반에는 정부는 파주, 교하, 곡삿ㄴ, 춘천, 공주 등지에 은광을 열과 세금을 징수하였다.
......
이 시기 중앙의 군영이 제각기 광산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은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호조에서 광산을 일원적으로 관리하면서 변화해 갔다.
......
이 때의 노동자들은 토지에서 밀려나고 생활의 터전을 잃어버려 호적에도 들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앞 시기에 비해 임금노동자로서의 성격이 짙어져 매월 또는 매년 일정액의 임금을 받고 일하였다.
......
18세기 말, 19세기 전반기에 와서는 자본을 바탕으로 한 민영 광업이 발전하였다. 이때는 국가의 비효율적인 통제 속에서 은광은 오히려 쇠퇴하였지만, 큰 이익이 남은 금광의 개발이 매우 활발해졌다. 이제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광산 노동자, 가족노동력을 이끌고 금광 채굴에 나서는 사람들이 더욱 일반화하였다."
(184쪽~187쪽)



하얀 작은 황금, 소금 - 생산에서 세금까지
"소금 생산은 한달에 상,하현 기간인 12일 정도밖에 작업하지 못하였고, 그것도 비가 오지 않는 봄,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때문에 소금의 생산량은한정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그 가격은 매우 높아 당시 쌀값의 절반 이상 되었다. 이러한 소금 생산은 날씨에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에 '하늘이 짓는 농사'라고 하였고, 하루 종일 땡볕에서 고된 노동을 하면서 땀을 식히고 피로를 풀기 위한 노동요와 민속놀이인 소금놀이마당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만큼 소금 생산 과정은 힘들어 무거운 죄를 지은 범죄자에게는 소금을 굽게 하는 도형(징역)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197쪽)  



농민의 조세 부담


궁궐의 뒷간
"그럼 궁궐에 뒷간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자료를 살펴보자. 앞서 말한 <궁궐지>와 함께 작성된, 크고 상세한 도면인 <북궐도형>과 <동궐도형>은 당시 궁궐의 모습을 좀 더 정확하게 보여 준다. 이 자료들에 따르면 경복궁에는 뒷간이 28군데나 있었으며, 그 규모를 모두 합하면 51.5간이었다. 동궐에는 21군데, 36간 정도의 뒷간이  있었다. 뒷간은 대개 한 간이었으나, 큰 것은 일곱 간에 달했다. 한 간짜리 집이란 네 개의 기둥으로 된 가장 자은 건물이다. 주택으로서 가장 작은 것을 흔히 '초가 삼가나'이라 하는 데 비해 뒷간이 일곱 간이라면 화장실치고는 제법 큰 건물이다." (229쪽)



농민의 하루살이와 한해살이
"국가에서 또는 지방 수령이 농사일에 자문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사람이 바로 늙은 농부였다. 세종대왕이 <농사직설>(1429)을 편찬하기 위하여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관찰사에게 농업기술을 수집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강조한 것도 당시 각 지역의 가장 선진적인 농사 기술을 알고 있는 노련한 농부의 경험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17세기 중반 효종 대에 신속이 <농가집성>을 편찬할 때 참고한 것도 당시의 속방 즉 어느 지역, 어떤 농부들이 사용하고 있던 선진적인 농업기술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노농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높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241쪽)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
"우리는 원칙적으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상을 차렸다. 즉 한 식탁에서 여럿이 같이 먹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상을 받았다.
......
그러나 우리는 신분에 관계 없이 모두 혼자서 상을 받았다. 지금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때 교자상을 쓰고 있지만 예전에는 잔치 때에도 독상을 받았던 사실이 당시의 기록이나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254쪽)



조선시대의 술과 주막
"금주령을 어기면 어떤 처벌을 받았는가? 양에 따라, 용도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라서, 훈방에 그치는 경우부터 장 일백 대를 친 후 변방 산골짜기나 바닷가에 유배 보내는 경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형량이 무거웠던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왕명의 권위에 민감했던 영조는 처벌에도 단호했다." (262쪽)


"그런데 금주령을 무시하고 공공연히 술을 먹어되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통틀어 다섯 명밖에 안되는 사간원 언관들이었다. <필원잡기>에 따르면 이들은 공무 중은 물론 금주령하에서도 음주를 허용받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왕의 잘못을 들춰내어 바로잡는 어려운 일을 맡고 있었으므로 평소에도 이렇게 기개를 꺾지 말고 키워 두어야 자신의 직위와 생명을걸고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63쪽)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한다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경우 혼자서 담배통에 불을 붙이면서 물부리를 빠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불을 붙이는 하인이 딸리기 마련이었다. 즉 장죽으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것은 양반층을 비롯한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계층에 국한되고 일반 상민은 곰방대를 애용할 수밖에 없었다. 양반층 가운데서도 재산이 넉넉한 사람들은 백통이나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고 금이나 은으로 무늬를 넣어 치장한 장죽을 사용하기도 했다." (275쪽)



조선시대의 군대생활
"이처럼 조선의 군대는 현재의 군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양반의 군대 생활은 관료롤 진출하는 특전을 얻는 것이었지만, 군인의 대다수를 이루는 일반 양인들에게 군대 복무는 감당하기 힘든 고된 생활이었다. 복무 기간이 긴 점, 하급 군사에게 월급이 제공되지 않은 점, 종종 군인 스스로 무기나 복장을 마련함으로써 군인의 경제적 부담이 심했던 점, 신분에 따라 군대 편성이나 처우가 달랐던 점, 군역세를 내는 군역 담당자가 존재했던 점 등이 그 원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의 군인들은 공식적으로 군역에 면제되는 것과는 별도로 온갖 편법을 동원하여 병역을 기피하려 하였다." (282~283쪽) 

<목차>

조선 인구가 1천만 명을 넘어선 시기는 /고동환
조선시대에도 이혼을 했을까 /권순형
족보에도 가짜가 있나요 /정진영
향약은 지방자치의 원형이었을까 /권내현
서당에서 향교, 서원까지 /장동표
농민이 두레를 만든 까닭 /이해준
신분 사회의 피해자, 백정 /권기중
임꺽정의 분노와 좌절/한상권
조선시대 형벌 제도는 어떠하였나 /심재우
돈 한 냥, 쌀 한 말, 베 한 필의 가치 /이헌창
농사는 어떻게 지었나 /김건태
서울의 장사꾼들 /이욱
장돌뱅이의 애환 /유필조
역관들이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다는데 /김경란
광산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오수창
하얀 작은 황금, 소금 - 생산에서 세금까지 /김의환
농민의 조세 부담 /김성우
궁궐의 뒷간 /홍순민
농민의 하루살이와 한해살이 /염정섭
조선시대의 식생활과 음식 문화 /정연식
조선시대의 술과 주막 /정연식
담뱃대의 길이는 신분에 비례한다 /오종록
조선시대의 군대 생활 /서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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