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기행

저자
황인희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0-10-25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두 발로 짚어보는 조선 역사! 왕의 무덤으로 떠나는 역사 여행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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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조선 왕릉 기행이다. 기행이라는 말에서 눈치를 챌 수 있는데, 왕릉에 대한 시간순의 설명이 아니라 여행을 염두에 두고 왕릉을 둘러본다는 생각으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519년에 대한 시간순의 개념이 부족하면 뒤죽박죽인 시간 순서가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이왕 여행의 개념을 넣었으면 왕릉군 별로 간단한 지도라도 삽입해서 동선을 구별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친절함은 없다. 아쉬운 점이다.

 


 

익릉 :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 사도세자의 생모
일반적인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정면에서 볼 때 세 칸, 옆면에서 볼 때 두 칸짜리 건물인데 익릉의 정자각은 건물의 사방에 익랑이라는 것이 더 붙어 있습니다. '날개처럼 붙은 복도'라는 뜻인데요, 이 익랑 때문에 정면이 다섯 칸, 옆면이 다섯 칸으로 커다란 건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익랑이 있는 건물 구조는 중국식입니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정면 처마에 치마처럼 방풍판이 달려 있는데 이는 우리 고유의 양식입니다. 바로 윗대 현종의 숭릉(동구릉 소재) 정자각이 중국식의 팔작지붕에 방풍판이 없는 형태였던 걸 생각하면 다시 우리식으로 돌아온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42쪽)


경릉 : 덕종(의경세자,세조의 맏아들)과 소혜왕후
덕종은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목조, 익조, 탁조, 환조)을 제외하고는 조선 최초의 추존왕이지요. 세자의 신분으로 죽은 것도 조선 개국 이래 의경세자가 처음이었습니다. 세조가 대신들과 능제를 의논한 결과, 왕릉에서 무석인이 서 있는 3단계 장대석을 생략하고 문석인만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후 덕종의 능은 추존왕릉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46쪽)


예릉 :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
조선의 능침은 초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나누어 중계에 문석인을, 하계에 무석인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하였습니다. 또 예릉의 특이한 점은 다른 능에서는 중계에 있던 장명등석이 하계의 끝부분에 서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장명등석이 앞으로 나온 이유는 하계 부분이 앞으로 길게 나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장명등석 자리가 사초지의 정중앙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명등석은 다리가 길어졌고 지붕 위에는 둥근 물결 무늬가 몇 겹 새겨져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조선 왕릉의 장명등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식입니다. (79쪽)


정자각도 크고 웅장하며 처마마루 위의 잡상도 다른 왕릉보다 두 개 더 많은 다섯 개가 올라앉아 있습니다. 어수선한 나라 분위기에, 백성은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도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왕릉을 만든 사람은 다음 왕 고종 때 섭정을 한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오랜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와아권을 강화하려면 왕실의 권위부터 세워야 했기에 왕릉을 최대한 호화롭게 꾸민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석물들은 중종의 정릉, 순조의 인릉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느라 버리고 간 석물들을 재활용한 것들입니다 문무석인과 호석, 마석은 정릉의, 나머지 석물은 인릉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자각까지 뻗어 있는 참도가 이전 능과는 달리 3단인 것도 특이합니다. 중앙이 신도이고 양 옆 길이 어도인데 철종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그의 능도 황제릉의 형식을 다른 것입니다. (80쪽)


희릉 :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
희릉의 정자각은 측면에서 봤을 때 앞부분 회랑이 세 칸입니다. 전통적인 정자각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회랑으로 되어 있는데 희릉부터 세 칸 짜리 익랑이 등장했습니다. 정자각의 왼쪽에 있는 예감에는 다른 능에 없는 뚜껑이 있습니다. (86쪽)


효릉 :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
혼유석과 장명등석, 한 쌍씩의 망주석, 문석인, 무석인 등 석물들이 서 있는 것은 다른 능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효릉의 정자각 옆에는 태종의 헌릉 이후 왕릉에서 사라졌던 소전대가 있습니다. 소전대는 제향 때 돈을 태워 날리는 공간이고 예감은 축문을 슨 나무판을 묻는 곳입니다. 제향을 끝내고 전 해에 묻었던 축판을 꺼낸 후 그해 새로 나온 축판을 묻었다고 합니다. 요즘은 제향 때 종이에 축문을 서서 예감에서 태우지요. 소전대가 사라진 후로는 예감이 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효릉에서처럼 소전대와 예감이 한꺼번에 발견됨으로써 그 역할이 달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5쪽)


온릉 :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 신씨
온릉은 일반인에게는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 능입니다. (107쪽)


공릉 :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 한씨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참도는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인데 공릉의 참도는 ㄱ자로 꺾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아마도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능을 조성했기 때문인 듯 합니다. (117쪽)


영릉 : 영조의 큰아들 진종(효장세자)과 그의 비 효순왕후 조씨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참도는 다른 능과 달리 신도와 어도의 두 단이 아닌 한 단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대신 정자각 앞쪽에 박석이 넓게 깔려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이 두 채 서 있는데 그중 능침 쪽에 있는 작은 비각에는 효장세자의 묘임을 알리는 옛날 비가 서 있습니다. 아래쪽 큰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하나는 진종대왕의 능임을,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의 진종소황제의 능임을 나타내는 비석입니다. 세자 묘에서 왕릉으로, 황제릉으로 바뀌어온 영릉의 역사를 말해주는 비석들입니다. (127쪽)


장릉 : 인조와 원비 인열왕후 한씨
조선 왕릉의 참도 중 가장 넓은 장릉의 참도.(131쪽)


장릉은 원래 현재의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왕비의 능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두었고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준비된 자리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뤄 석물 틈에 집을 짓고 있어서 영조 때인 1731년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천장을 했습니다. 천장을 하면서 합장릉을 만들었는데, 옛 능의 병풍석, 난간석 등이 새 능과 규모가 맞지 않아서 옮겨오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습니다.따라서 장릉에서는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136쪽)


장릉은 비공개 능인데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주차장이나 진입 도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137쪽)


태릉 :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 윤씨
태릉의 능침은 태조의 건원릉보다도 더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실제로 문무석인의 키가 345cm로 조선 왕릉 중에서 가장 큽니다. 이를 지적하는 상소가 빗발칠 만큼 당시 그 규모가 문젯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145쪽)


강릉 :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태릉에서 퇴계원 쪽으로 가다보면 삼육대학교가 있습니다. 그 정문 왼쪽으로 철문이 하나 보이는데 그곳이 강릉의 입구입니다. 강릉은 비공개 능입니다. (147쪽)


정릉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
또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능침 아래 있는 소전대입니다. 소전대는 제향을 마치고 축문을 태우는 석물인데 역시 조선 초기에만 있었던 양식입니다. 정릉의 소전대는 원래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2008년 정릉 숲 속 약수터에서 발견되어 제자리를 찾은 것이어서 그 의미가 더욱 큽니다. (163쪽)


광릉 :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광릉 홍살문에 들어서면 정자각 뒤 양쪽으로 아득하게 높은 언덕이 보입니다. 입구에서 보기에 왼쪽 언덕이 세조이 능이며 오른쪽이 정희왕후의 능입니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이지만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따로 모시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태의 동원이강릉입니다.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광릉에서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183쪽)

 

의릉 :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
홍살문 들어서 정면으로 보이는 정자각은 좌우에 익랑이 달려 있는 다섯 칸짜리 건물입니다. 일반적인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정면에서 볼 때 세 칸 건물인데 현종 무렵부터 들어온 중국풍의 영향으로 익랑이 붙은 정자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185쪽)


의릉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왕과 왕비의 능침이 한 언덕에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능의 형태를 동원상하봉이라 합니다. 좌우로 나란히 쌍릉을 만들면 능침이 정혈을 벗어나는 경우 이렇게 상하로 조성하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정기가 한곳으로 흘러내리니 그 지점에 상하로 묘를 썼다는 것입니다. 위쪽에 경종이 묻혀 있고 아래쪽에 왕비가 잠들어 있습니다. (186쪽)


수릉 : 추존왕 익종(효명세자)과 신정왕후 조씨
수릉은 하나의 능침에 혼유석도 하나만 마련되어 있어 마치 한 사람만을 위한 단릉처럼 보이지만 익종과 신정왕후의 합장릉입니다. 왕릉의 앞 공간은 초계, 중계, 하계의 3단으로 나뉘고 문석인은 중계에, 무석인은 하계에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릉에서는 중계와 하계가 합쳐져 문석인과 무석인이 같은 단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분 제도가 변하면서 반영된 변화입니다. (200~201쪽)


현릉 :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현릉에 가면, 홍살문, 정자각과 비각도 모두 하나이지만 왕과 왕비의 능침만 각각 다른 언덕 위 따로 만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합니다. 동원이강릉은 세조의 능에서 처음 쓰인 양식입니다. 문종과 현덕왕후 두 사람 모두 세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어덯게 동원이강릉이 될 수 있었을까요? (203쪽)


목릉 :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목릉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인 유릉의 터였습니다.
(중략)
선조의 목릉도 원래 건원릉의 서편 현재의 경릉 자리에 따로 조영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후 장인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실한 산릉공사를 한 탓에 병풍석이 기울어지자 심명세라는 사람이 목릉에 물이 차서 불길하니 능을 옮겨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장을 하려고 능을 파보니 흙이 보송보송한 길지여서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번 파버린 능을 다시 덮을 수는 없었지요. 그래서 현 위치로 천장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232쪽)


휘릉 :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휘릉의 정자각을 보면 모습이 여느 능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정자각은 정면에서 봤을 때 세 칸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휘릉의 정자각은 좌우로 날개 격인 익랑이 붙어서 다섯 칸의 건물입니다. 이는 현종과 숙종 때 유행하던 중국풍의 건물 양식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241쪽)


원릉 :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
(사진설명)원릉부터 중계와 하계를 구별 짓는 단계석이 사라졌다. 문무관의 평등이 어느 정도 실현된 것이다. (244쪽)


영조는 원래 서오릉의 홍릉, 원비 정성왕후 옆에 자신의 묏자리를 정해 놓았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자리에 가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 묻혔습니다. 현재 동구릉의 원릉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이 있었던 곳입니다. 그런데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봉분을 열고 천장한 파묘한 자리이지요. 당시 봉분을 열어보니 별 문제 없이 깨끗하여 영릉도감의 책임자가 파직되기도 한, 부정 탄 자리였습니다. 심지어는 경종의 왕릉 택지로 추천되었을 때 영조가 국장에 어떻게 파묘하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250쪽)


경릉 : 헌종과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경릉은 그 조성 과정에 씁쓸한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 이 자리는 선조의 목릉이 있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목릉에 물이 차고 불길하다는 상소에 따라 목릉을 천장했지요. 그러나 능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불길론'은 해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묘를 썼다가 파헤친 자리는 기가 빠져나가 흉당이 되어버리지요. 그런데 효현왕후의 능을 이 자리에 조성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왕이 살아 있을 때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 곁에 자리를 마련하라는 유언이 없으면 왕을 왕비 곁에 장사지내지 않는 것이 전통 조선 왕릉제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헌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안동 김씨들은 새로운 길지를 물색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는 열세 군데나 다녔지만 결국 이곳을 십전대길지라 하면서 최고의 명당으로 추천했습니다. 파묘한 자리는 흉당의 요소 중 하나인데 말입니다. (257쪽)


홍릉 :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점은, 사초지 위가 초계 중계, 하계의 구분이 없고 석물들이 사초지 아래 참도 좌우로 늘어서 있다는 점입니다. 또 정자각 대신 일자형의 건물인 침전을 세웠습니다. 침전은 임금의 숙소라는 뜻입니다. 중국에서는 능이란 황제가 죽어서도 나라를 통치할 지하 궁전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중국 황제릉을 본떠 만든 홍릉과 유릉에는 침전이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왕릉의 정자각과는 그 용도가 다른 건물이지요. 지붕 형식 또한 왕릉처럼 맞배지붕이 아니고 팔작지붕으로 바뀌었으며,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건물로 지어졌습니다. (284쪽)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의 능호입니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을 이왕가로 격하시켜버린 일본은 고종의 능호를 따로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고종이 능호를 쓴다는 것은 대한제국 황제의 신분을 인정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성황후와 합장하고 홍릉이라는 능호를 쓰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사건을 겪어내고 끝내 나라가 망하는 것까지 봐야 했던 고종, 망국의 황제가 능호를 갖는 방법은 이미 정해진 황후의 능호를 함께 쓰는 방법밖에는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284~285쪽)


유릉 :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
순종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방해로 능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고종과 같은 편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순종이 즉위하기 전에 별세하여 경기 용마산에 안장되었던 순명효황후의 묘소 유강원을 유릉으로 추봉했는데 이 유릉을 지금의 금곡으로 천장하여 순종과 함께 합장하여 간신히 순종도 유릉이라는 능호를 얻게 된 것입니다. 훗날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도 유릉에 합장되어, 유릉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 하나에 세 사람이 합장된 동봉삼실형의 능이 되었습니다. (291쪽)


사릉 :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
사릉은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붙여진 애틋한 사연이 담긴 능호입니다.. 단종의 영월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 살아서 애틋하게 이별한 어린 부부의 한을 죽어서나마 풀어주도록 두 능을 합치자는 의견이 더러 있었지만 문화재 보존의 차원에서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남양주시와 영월군은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기 위해 자매 결연하고, 사릉과 장릉에 소나무를 교차 식수했다고 합니다. 사릉에 찾아가면 영월 장릉에서 온 소나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찾아볼 만합니다.


(중략)


사릉은 현재 비공개 능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으로 조용히 참배만 하고 나온다면 간단한 절차를 거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99쪽)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순조의 능은 원래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 오른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철종 때 자리가 불길하다는 주장이 있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고, 순원왕후가 별세하자 이곳에 합장되었습니다. 합장릉에는 봉분은 하나라도 혼유석을 두 개를 놓아 두 분을 모셨다는 표시를 하는데 인릉에는 혼유석이 하나뿐입니다. (352쪽)


사초지 오른쪽에 계단이 있어 위까지 올라가볼 수는 있지만 능침 앞까지 가서 참배하려면 관리소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특히 인릉의 언덕 너머로 중요 국가 기관이 있어 사초지 위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355쪽)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
문종과 단종 시대를 지내고 세조가 즉위하면서 조선 왕실은 첫째 아들이 일찍 죽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문종과 그 아들 단종,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도 모두 맏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세조는 물길이 지나는 곳에 쓴 세종의 능 자리가 맘에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로 천장이 무산되었지만 세조는 후계자인 예종에게 영릉을 천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새 능 자리를 물색하게 했고 이곳 여주로 영릉을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393쪽)


세종전 앞뜰에는 측우기, 물시계, 관천대 등이 진열되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재실이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훈민문을 통과하여 홍살문을 들어서면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느낌이 듭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의 능으로 제대로 보존되었다기보다는 도심 한복판의 공원을 만들어놓은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영릉 성역화를 하면서 왕릉에 너무 많은 손질을 더한 탓입니다. 일단 홍살문과 정자각은 일자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비스듬히 꺾여 있는 것부터 예에 어긋나 보입니다. 복원하면서 자리를 잘못 잡은 듯합니다. 또 세종은 분명 왕이었는데 참도가 황제의 참도인 3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세종대왕을 황제로 대접하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참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무조건 많이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고증을 통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만은 못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394쪽)


영릉 :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영릉에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보통 홍살문 밖에 있는 금천교가 홍살문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물길이 정자각과 가까이 흐르는데 그 자연물을 거스르지 않고 능을 조성했기 때문이겠지요. 또 동계도 신도와 어도로 이어진 계단 두 개만 있어야 하는데 계단이 세개입니다. 세종의 영릉에 참도를 세 단으로 만들고 동계를 세 개로 만들 때의 영향으로 계단이 하나 더 늘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영릉은 사초지 위에까지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단 그 위에 일부러 만들어놓은 '포토 라인'은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401쪽)


<오타>
(257쪽)
효정왕후는 1903년 후사 없이 7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58쪽)
삼연릉이 된 사연은 더축 처절합니다. 1904년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가 73세로 세상을 떠나자 효현왕후 곁에 봉분을 만들었습니다.
==> 효정왕후의 승하 연도가 1903년인가 1904년인가???

두산백과사전 : 1903년 덕수궁 수인당에서 소생없이 73세로 사망하였다.

 

 

 

 

 

 

 

<목차>

책을 내면서
왕릉 기행을 시작하기 전에

제1일 서오릉-숙종을 둘러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날 수 있는 가족 묘역
명릉(明陵) 익릉(翼陵) 경릉(敬陵) 홍릉(弘陵) 창릉(昌陵)

제2일 서삼릉·온릉-식민지 시대와 산업화가 만들어낸 왕실의 공동묘지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 온릉(溫陵)

제3일 파주삼릉·장릉-전란에 시달리거나 요절한, 비운의 왕과 왕비들의 능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장릉(長陵)

제4일 태강릉·정릉·연산군묘-빗나간 욕망이 휘둘린 왕과 왕비들의 능묘
태릉(泰陵) 강릉(康陵) 정릉(貞陵) 연산군묘

제5일 광릉·의릉-천연 생태박물관 수목원까지 남겨준 최고의 명당
광릉(光陵) 의릉(懿陵)

제6일 동구릉-아홉 기의 왕릉이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왕릉군
수릉(綏陵) 현릉(顯陵) 건원릉(建元陵) 목릉(穆陵) 휘릉(徽陵)
원릉(元陵) 경릉(景陵) 혜릉(惠陵) 숭릉(崇陵)

제7일 홍유릉·사릉·광해군묘-화려해서 더욱 서글픈 두 황제의 능
홍릉(洪陵) 유릉(裕陵) 사릉(思陵) 광해군묘

제8일 선정릉·헌인릉-번잡한 도시의 삶 속에서 뜻밖에 만나는 울창한 습지
선릉(宣陵) 정릉(靖陵) 헌릉(獻陵) 인릉(仁陵)

제9일 융건릉·장릉-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
융릉(隆陵) 건릉(健陵) 장릉(章陵)

제10일 영녕릉·영월 장릉-도성 80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벗어난 왕릉들
영릉(英陵) 영릉(寧陵) 장릉(莊陵)

부록 1 -조선 왕조 세계도(世系圖)
부록 2 -조선 왕릉 제향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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