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구성은 조선 왕조 역대 왕의 재위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왕릉의 위치는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닌다. 짤막한 역사의 내용과 함께 각 왕의 특징을 왕릉과 함께 엮어서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왕릉의 이름과 주인공, 그리고 간략한 특징들을 인용한 것이다. 독자로써 다음에 해당 왕릉을 찾을 때 한번 쯤 다시 보고 가면 좋을 듯한 특징을 나름 발췌해보았다.
광해군묘
장릉 : 인조와 인열왕후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숭릉 : 현종과 원비 명성왕후
명릉 :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중략)...
제2계비 인원왕후의 무덤이 외따로 초라한 것은 그녀의 소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 오래 살았다.
....(중략)...
숙종이 승하하자 청상과부 인원왕후는 33세에 왕대비(경종 재위시)에 올랐고, 37세 때(영조 재위시)는 자동적으로 대왕대비가 되었다. 손자뻘인 영조와는 일곱살 연상이었다. 그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대왕대비 인원왕후는 1757년(영조33) 3월 26일 70세로 승하했다. 죽을자리, 죽을 시기를 잘 찾는 것도 복이다. 인원왕후는 그런 복이 없었다. 인원왕후보다 1달여 앞선 2월 15일,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65세로 승하했다. 정성왕후의 국장이 진행됐다.
...(중략)...
인원왕후는 영조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계모에 불과했다.
영조는 대왕대비의 유택을 위해 경비와 인력을 들일 여력도, 의지도 없었다. 벌채 경비도 아끼고 정자각 건립 비용도 생략했다. 명릉 능역 하나 모퉁이를 살짝 오려내어 대왕대비를 안장했다. 가장 저렴한 왕릉 공사였다. 그래서 인원왕후의 능은 능호도 없고 정자각도 없다. (70~73쪽)
익릉 : 숙종 원비 인경왕후
의릉 :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혜릉 : 경종 원비 단의왕후
홍릉 : 영조 원비 정성왕후
융릉 : 추존왕 장조와 경의왕후
건릉 : 정조와 효의왕후
왕자와 공주, 후궁의 공동묘지 그리고 태실 집장지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으로 망조왕실을 관리하기 위하여 이왕직이 설치되었다. 이왕직에서는 서울•경기 일원에 산재한 왕자와 공주, 후궁 등의 분묘를 집장관리 한다는 명목 아래 서삼릉 경역 내 현 집장지를 선정했다. 일제강점기 때 숙종의 후궁인 소의유씨묘 외 15기와 세종대왕의 1녀 정소공주묘 외 18기를 천묘 집장했다.
8.15 광복 후에는 일제강점기 때 옮기지 못한 후궁묘 중 묘역 주변 개발로 인하여 존치가 어렵게 된 명종 후궁 경빈이씨묘 외 6기를 천묘했다. 왕자묘로서는 고종의 제1남 완화군묘를 천묘했다. 그 많던 왕자와 공주, 후궁들은 어디로 갔나. 아직 서울•경기 일원에 묻혀 있는 일부와 여기 46기가 전부다. 역사에 이름이 올려진 이들은 번듯한 유택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갑남을녀처럼 사라졌다. (179쪽)
인릉 : 순조와 순원왕후
경릉 :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
홍릉 : 고종과 명성황후
선대 왕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은 조선 왕릉의 핵심 구조로 꼽힌다. 평면이 '丁'자 모양이라 '정자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홍릉과 유릉에는 정자각대신 ' 一'자 모양의 침전이 있다. 왜 그럴까? 비밀은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에 있다. 고종은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선포하고 황제가 됐다. 이후 왕릉 형식도 '一'자 모양 침전이 있는 중국 황제릉과 비슷해졌다.
(215쪽)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1월 30일 남양주시 금곡에 능역을 잡고 산역을 시작했다. 같은 시각 청량리 홍릉에서도 능을 파기 시작했다. 2월 16일 명성황후가 먼저 금곡으로 이장되었다. 3월 3일 전날 발인한 고종은 명성황후와 합장되었다. 그들은 24년 만에 지하에 함께 잠들었다. 망국의 황제는 능호도 없다. 홍릉은 부인 명성황후의 능호이다. (227쪽)
유릉 : 순종과 원비 순명황후 및 계비 순정황후
(오류)
소현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사람이 이세완의 부인? (p58)
--> 이세완의 부인이 종친이라서 이세완이 염습에 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아무리 종친이라지만 여인이 세자의 염습에 참여할 수 있을까???
<목차>
우리 시대에 왕릉이란 무엇인가
제15대 광해군과 문성군 부인 광해군묘
역사는 준엄한가, 너그러운가, 애석한가
추존왕 원종과 인헌왕후 장릉
왕이란 이름은 물려주기도 하고, 올려 바치기도 하네
제16대 인조와 인열왕후 장릉
반정은 짧고 굴욕은 길다
제16대 인조 계비 장렬왕후
휘릉 예송논쟁에 휘말려 살다 간 불우한 여인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영릉
북벌의 영웅인가, 순진한 몽상가인가
소현세자 소경원
명분보다 현실을 중히 여기다가 고혼이 된 선각자
제18대 현종과 원비 명성왕후
숭릉 치적 쌓을 틈도 없이 예송논쟁에 시달린 왕 노릇 15년
제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및 제2계비 인원왕후 명릉
여인천하 경연장의 외로운 감독, 숙종
희빈 장씨 대빈묘
애욕은 꽃밭에 숨은 독사와 같다
제19대 숙종 후궁 숙빈 최씨 소령원
무수리에서 왕의 여자,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
제19대 숙종 원비 인경왕후 익릉
이승에서는 박복했으나 유택은 웅장하네
제20대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의릉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제20대 경조 원비 단의왕후 혜릉
이름도, 흔적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어요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원릉
조선의 장수왕, 영조
제21대 영조 원비 정성왕후 홍릉
천하 명당에 누웠건만 옆구리가 시리다
추존왕 진종과 효순왕후 영릉
아홉 살 나이에 정조의 아버지가 되다니?
추존왕 장조와 경의왕후 융릉
야속한 아비의 아들, 장한 아들의 아버지 사도세자
제22대 정조와 효의왕후 건릉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의 꿈을 펼친 수원 화성과 행궁
정조와 효찰 대본산 용주사
내시 무덤
왕의 손발, 왕의 그림자, 내시 이야기
궁녀 무덤
이름 없는 여인들, 여기 잠들다
왕자와 공주, 후궁의 공동묘지 그리고 태실 집장지
어이! 왕자, 공주, 차려! 가로 세로 줄 맞춰! 거기, 후궁도 마찬가지!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 인릉
해는 서산으로, 조선의 역사도 함지咸池를 향해 가네
추존왕 익종과 신정왕후 수릉
조선의 마지막 희망, 촛불춤으로 지다
제24대 헌종과 원비 효현왕후 및 계비 효정왕후 경릉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삼연릉의 비밀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예릉
허수아비 왕의 사랑과 비극
제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홍릉
대원군의 아들, 명성황후의 남편으로 부르지 말아 주시오
천인공노天人共怒란 말이 부족하다, 명성황후 시해弑害
흥선대원군묘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 흥선대원군
고종의 후궁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 영휘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맏아들 이진 숭인원
아관파천의 행동대장 엄귀비와 나란히 잠든 핏덩이 황손
핏덩이 이진의 죽음
제27대 순종과 원비 순명황후 및 계비 순정황후 유릉
마지막 황제의 선물, 6·10만세운동
영친왕 이은과 비 이방자 여사 영원
격랑의 한일근세사를 살아온 영친왕 전하!
의친왕 이강과 비 김수덕 여사 묘
조선 왕조의 마침표, 비석조차 없는 의친왕의 무덤
에필로그 최상의 죽음은 법문이다
[부록]
▷조선시대 능·원·묘 일람
▷조선 역대 왕 생존연대 및 재위기간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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